2020년 해외 재즈 앨범 베스트 30에 이어 국내 재즈 앨범 베스트 12를 선정한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감염증 유행 때문인지 몇 년간 100장 이상 발매되던 앨범이 2020년에는 80여장으로 감소했다. 그만큼 후보에 오른 앨범도 적었다. 17장이 1차 후보였다. 그래서 그 절반에 가까운 8장을 선정하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10장으로 해보려 해도 계속 두 장이 눈에 밟혔다. 그래서 애매한 12장을 선정하기로 했다.
최근 몇 년간 우리 재즈 앨범의 특징은 앨범 수는 적지만 다양한 스타일이 공존한다는데 있다. 모순은 그것이 애호가의 다양성에 기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차피 소수가 들을 테니 그냥 나 하고픈 대로 해보자는 연주자의 마음이 현재의 다양성을 이끌었다.
다양하지만 한편으로는 개인성에 치우친 나머지 한 밤에 쓰는, 아침에 보고는 결국 부치지 못하는 연애 편지 같은 앨범이 그동안 많았다. 그러나 2020년 선정된 앨범은 연주력과 주제 그리고 그 표현에 있어 자기 객관화를 이룬, 그래서 감상자에게도 다가갈 수 있는 앨범이 총 앨범 발매 수에 비해 많았다. 이제 우리 재즈도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을 시작한 것이다.
한편 국내 재즈 앨범을 선정할 때는 부담이 많다. 아무래도 연주자가 가까이 있으니 그렇다. 특히 내가 아무리 거리를 두려고 해도 라이너 노트를 써주면서 인연을 맺은 연주자-그 수도 꽤 된다-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선정 과정에서도 미안한 마음이 드는 연주자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기준, 내 객관성을 어찌 배신할 수 있을까? 부디 그 분들은 13번째 앨범으로 선정된 것으로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 부탁 드린다.
01. 정은혜 – 존재들의 부딪힘, 치다 (Audioguy)
피아노 연주자 정은혜의 이 앨범을 나는 2020년이 아닌 2019년 12월에 처음 들었다. 앨범 발매 전이었다. 듣자마자 나는 이 앨범을 아직 오지도 않은 2020년 최고의 앨범으로 꼽았다. 한국 재즈 베스트 앨범을 두고 본다면 나는 이 앨범을 최고의 앨범으로 선정하기 위해 한 해를 보냈다고 할 수 있다. 피아노 연주자는 이 앨범에서 첼로 연주자 지박, 드럼 연주자 서수진 그리고 국악 명창 배일동과 함께 즉흥 연주를 펼쳤다. 그것은 앨범 타이틀처럼 네 존재의 부딪힘이었다. 그 부딪힘은 서로를 부수고 끝내 파국으로 치닫는 충돌이 아니라 서로를 보듬으며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되는 접촉이었다. 재즈와 국악의 만남이 아닌 두 음악의 공존을 통한 새로운 음악을 생성하는 접촉!
02. 진수영 – 밤, 물 빛 (봉식통신판매)
멜로디, 리듬, 화성 등 음악적 요소가 아니라 소리의 질감이 먼저 귀에 들어오는 음악이 있다. 피아노 연주자 진수영의 이번 앨범이 그랬다. 이 앨범에 담긴 뮤트 피아노 소리는 물 먹은 듯 습기로 가득하다. 건반을 누를 때마다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다. 다소 일그러지고 불안정한 피아노가 주는 음악적 효과는 대단했다. 소리 자체가 앨범 타이틀의 “밤, 물 빛”을 구체화했으니 말이다. 여기에 단짠이 어우러진 선율을 바탕으로 확장되는 연주 또한 좋았다.
03. Pulse Theory – 이선재, 김은영, 석다연 (Ghetto Alive)
색소폰 연주자 이선재, 피아노 연주자 김은영, 드럼 연주자 석다연과 게토얼라이브에서 펼친 50여분간의 연주를 담은 앨범이다. 즉흥 연주이기에 복잡하게 발산하는 연주라 예상했는데 막상 들으니 그것이 아니었다. 매우 조화로웠다. 그것이 흥미로웠다. 이 조화는 아무 약속도 없는 만큼 서로를 더 면밀히 관찰, 배려한 결과였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약속 장소에 나타나리란 믿음 속에 친구를 기다렸듯이 말이다. 자유와 무질서는 분명 다른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해준 연주였다. .
04. 찰리 정 – Sein’s Blues (Charlie Jung)
그동안 나는 기타 연주자 찰리 정이 뛰어난 연주자라는 것은 알았지만 정서적으로는 그리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스타일이 우선했단 느낌이랄까? 그런데 이번 어쿠스틱 솔로 앨범은 달랐다. 연주 이전에 그는 자신의 삶을 고민했고 그것을 어떻게 풀어낼까 고민했다. 그 결과 이번 앨범은 늦은 밤 자신의 하루를 돌아보고 내일을 생각하며 한편으로는 자신을 믿고 잠든 가족을 바라보는 한 남자로서의 찰리 정의 독백을 담은 것이 되었다. 나와의 상관성은 생각할 필요 없다. 진실한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통한다. 이번 앨범으로 나는 찰리 정과 친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번도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사이임에도.
05. 이승은 – Goldfish (Seungeun Lee & jazzin)
그냥 평범한 졸업생의 앨범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소개에 의하면 유학을 다녀온 피아노 연주자는 아닌 듯하다. 그러나 그 연주는 유럽에서 적어도 5년 이상 산 연주자의 앨범 같았다. 연주력이 출중하되 그것에 기대지 않는, 정서의 표현에 집중하되 그렇다고 특정 선율이나 코드의 진행에 의존하지 않는 연주였다. 감성이 풍부한자, 낭만주의자로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감각적, 표면적 멜로디에 빠지거나 진지하고 깊이 있는 연주자처럼 보이기 위해 복잡한 화성에 빠지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감상적이지만 그것을 풀어가는데 있어서는 오히려 숙고를 거듭한 연주였다. 감히 말하면 2020년의 발견이었다.
06. 말로 – 송창식 송북 (JNH 뮤직)
우리 가요를 연주하거나 노래한 경우는 꽤 있었다. 그러나 한 명의 작곡가나 가수를 주제로 한, 말 그대로 송북 앨범은 없었다. 그런 면에서 송창식의 곡을 주제로 한 보컬 말로의 이번 앨범은 그 자체로 주목 받을 만 했다. 결과물도 훌륭했다. 작곡가로서의 송창식을 먼저 생각했겠지만 그것을 편곡하고 노래한 가수로서의 송창식도 고려한 연주와 노래였다. 다만 일반 팝 곡이 스탠더드 재즈 곡이 될 경우 코러스 부분만을 사용해 테마를 단순화하여 솔로의 가능성을 보다 열어두는데 말로는 원곡의 모든 것을 반영하려는 욕심에 재즈로서의 설득력이 다소 떨어지는 곡이 있어 아쉬웠다.
07. 정수민 – 통감 (BTP Record)
통감[痛感]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에 사무치게 느낌 혹은 아픈 느낌이다. 정수민은 첫 앨범에서 자본주의에서 소외되는 계층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표현했다. 이번 앨범도 그 연장선상에 놓인다. 차이가 있다면 곡들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아진 것일 뿐. 그래도 작곡과 연주에 있어서 정수민이 소외된 자들에게서 느낀 애잔한 마음, 공감한 고통의 표현에 이번 앨범이 더 설득력 있다. 한편 피아노 연주자 진수영과 색소폰 연주자 김오키가 함께했는데 이 세 사람이 이룬 느슨한 트리오를 계속 주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08. 고희안 트리오 – Live At Jazz First (고희안)
음악의 정서적인 면은 홀로 눈을 감고 들을 때 느끼기 쉽다. 라이브 연주는 아무래도 연주자가 눈 앞에 있기에 연주 그 자체에 감상을 집중하게 된다. 일본의 재즈 클럽 재즈 퍼스트에서의 공연을 담은 피아노 연주자 고희안의 이번 앨범도 마찬가지다. 역동적이고 밝은 연주가 2차적인 생각 없이 연주 그 자체에 집중하게 했다. 그리고 연주만으로 귀를 황홀하게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전통적인 스타일의 연주에 전 존재를 투영한 연주였다. 직선적인 연주로 순간의 감흥을 솔직하게 풀어낸 연주. 다시 말하지만 진심은 통한다.
09. 김오키새턴발라드 – 곽경수 오케스트라 (BTP Record)
색소폰 연주자 김오키의 이번 앨범의 타이틀 곽경수 오케스트라는 실재하지 않는다. 곽경수는 마영신 작가의 다음 웹툰 <아티스트>의 주요 인물의 하나다. 게다가 웹툰에서 그는 음악인이 아니다. 미술 전공으로 업계 권력의 지원을 받다가 그것을 남용해 결국 몰락하는 인물이다. 김오키는 그 곽경수의 삶에 대한 사운드트랙을 제시했다. (참고로 제작자가 마영신이다.) 웹툰을 먼저 보아서인지 음악을 듣는 내내 웹툰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에 걸맞게 곡을 쓰고 연주한 김오키의 비범한 능력을 새삼 생각했다.
10. 서보경 – 내면의 영화 (BK Diary)
색소폰 연주자 서보경의 이번 첫 앨범은 신인 연주자들이 견지하고 추구해야 할 것의 모범을 보여준다. 호흡을 길게 가져가 한번에 모든 것을 보여주려 노력하지 않고 자신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것에 집중해야 함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그녀의 색소폰은 자신이 주인공임을 내세우지 않고 더 아래로 내려가 동료들과 함께 하려 했다. 동료에게 자신이 하고픈 이야기를 건네고 함께 연주로 표현하려 했다. 이러한 겸손의 자세가 여운이 긴 음악으로 남았다.
11. 조윤성 & 신명섭 [Stellive Vol.4 | French Impressionism In Jazz]
피아노 연주자 조윤성과 색소폰 연주자 신명섭의 이번 앨범은 포레, 라벨, 드뷔시 등의 프랑스 인상주의 클래식 작곡가들의 음악을 주제로 하고 있다. 보통 클래식을 재즈로 연주할 경우 멜로디만을 가져와 스윙을 더해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스텔라이브 공연장에서 라이브로 연주된 연주는 보통의 경우를 넘는다. 원곡을 잘 이해하고 그에 걸맞게 인상주의적으로 편곡하고 연주했다. 그렇기에 널리 알려진 곡에 치우치지 않은,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좋아한 듯한 곡들까지 연주한 것 같다.
12. 혜인과 지현 – 계절이여 안녕 (혜인과 지현)
2020년 국내 재즈 앨범으로 제일 처음 들었다. 듣는 순간 아! 정은혜에 이어 올해의 앨범 후보를 만났다는 생각을 바로 했다. 그런데. 어찌 보면 재즈보다 내면을 드러낸 인디 음악이라며 장르적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나 또한 고민했다. 결국 지현 피아노 연주에 혜인이 노래한 이 앨범을 재즈로 분류하기로 했다. 이들이 자신들의 음악을 재즈라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음악적 전통을 반영한 유럽의 재즈, 피아노와 보컬 듀오 앨범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전통은 아니지만 우리의 현재 음악을 시성(詩性)이 강조된 재즈 앨범은 무엇일까 하면 이 앨범이 그 답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장르 이전에 무엇보다 청춘의 고민을 담은 듯한 아련한 정서와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글 덕분에 한국 재즈도 알게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ㅎ
좋은 음반소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