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에도 식지 않은 빌 에반스에 대한 존경과 애정
태초에 음악을 만든 그 누군가가 아니라면 모든 음악가는 모방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한다. 좋아하는 음악가의 작품, 누구나 인정하는 모범적 음악가의 작품을 듣고 그대로 연주하려 노력하며 음악적 소양을 쌓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나간다. 그런데 이 음악적 초창기, 형성기가 지나면 다수의 음악가들은 독창성을 인정받고 싶은 나머지 과거의 영향을 감추거나 부인하려는 성향을 보인다. (전적으로 부인하는 경우 완전히 다른 음악을 선보이기도 한다.)
이탈리아 출신의 피아노 연주자 엔리코 피에라눈지는 수 많은 빌 에반스의 후예 중 한명이다. 감히 말하면 나는 그를 빌 에반스의 유산을 가장 온전히 계승한 연주자라 하고 싶다. 빌 에반스보다 20년 늦게 태어난(1949년) 그는 20대 시절까지 버드 파웰, 백코리 타이너, 칙 코리아 등 힘과 기교가 돋보이는 연주자들의 영향이 강한 연주를 펼치다가 30대에 뒤 늦게 빌 에반스의 매력, 특히 왼손 보이싱에 빠져 지금의 시정 강한 연주를 펼치는 연주자로 성장, 성숙했다. (그의 시정에는 트럼펫 연주자 쳇 베이커와의 활동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2001년에 발매된 앨범 <Evans Remembered>처럼 우상을 주제로 앨범을 만들거나, 마크 존슨, 폴 모션 등 빌 에반스와 함께 했던 연주자와 트리오 앨범을 녹음하는 등 공공연하게 자신이 빌 에반스의 영향을 받았음을 드러내곤 했다. 특히 2001년에 발간된 책 <Bill Evans: Ritratto D’Artista Con Pianoforte(빌 에반스: 피아노 예술가의 초상)>은 빌 에반스에 대한 그의 존경과 애정이 보통이 아님을 감지하게 했다.
그럼에도 그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범접하기 어려운, 이번에는 그 스스로가 모방과 영향의 대상이 될만한 개성적 스타일리스트로 성장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좋아하는 선배 연주자를 꾸준히 연구한 끝에 아류가 아닌 선배의 음악을 계승 발전한 연주자가 된 것이다.
이쯤 되면 이제는 그 자신만의 길을 가도 될 것이다. 그러나 만 72세가 된 2021년 그는 베이스 연주자 토마스 폰스백과 듀오로 다시 한번 재즈 피아노의 시인을 그리는 앨범을 녹음했다. (이 듀오는 2018년 <Blue Waltz>를 선보였었다.) 왜일까? 자신과 빌 에반스의 관계를 우리가 잊지 않기를 바란 것일까? 앨범에 담긴 연주로 보아서는 그보다 수십년의 시간 동안 피아노 연주자 그 자체가 된 빌 에반스, 빌 에반스와 동화된 자신을 보여주려 한 듯 하다. 연주된 곡들의 면모가 그렇다. 빌 에반스가 쓴 곡은 “Only Child”, “Interplay” 이렇게 두 곡 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에 빌 에반스가 1979년 하모니카 연주자 투스 틸먼스와 함께 했던 앨범 <Affinity>에서 연주했던, 필 마코비츠의 곡 “Sno’ Peas”를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10곡은 엔리코 피에라눈지와 토마스 폰스백의 곡이다.
그럼에도 빌 에반스의 그림자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깨질 듯 섬세한 질감, 오른손과 별개로 노래하는 듯한 왼손의 우아한 움직임 등이 빌 에반스를 추억하게 한다. 특히 나는 “Passing Shadows”에서 창백하게 빛났던 빌 에반스의 후기를 떠올렸다. 또한 피아노에 집중하며 적절히 반응하며 자기 소리를 내는 베이스 또한 빌 에반스와 함께 했던 베이스 연주자들을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빌 에반스를 연상시키는 이 연주는 그대로 엔리코 피에라눈지의 것이기도 하다. 앨범 타이틀 곡에서의 서정미, “Il Giardino Di Anne(안네의 정원)”에 담긴 이탈리아적인 정서, 베이스가 테마를 이끄는 “People Change”에서의 따스한 솔로와 대화를 들으면 빌 에반스와 함께 엔리코 피에라눈지가 절로 떠오를 것이다.
“Our Foolish Heart”는 어쩌면 진정한 이 앨범의 타이틀 곡일 수도 있겠다. 빌 에반스가 트리오 편성으로 앨범 (1962)에서 연주했던 “My Foolish Heart”를 새로이 변주한 이 곡은 엔리코 피에라눈지로 전해져 새로워진 빌 에반스의 시정을 그대로 느끼게 한다.
좋아하는 대상을 향한 마음을 담은 앨범은 단지 대상의 모방에 그치면 안된다. 대상이 어떻게 창조적으로 자신의 현재에 영향을 주었는지 드러내야 한다. 엔리코 피에라눈지의 이번 앨범은 그 좋은 예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