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영화 – 서보경 (BK Diary 2020)

나는 매 해 300장에서 400장 사이의 새 앨범을 듣는다. 하루에 한 장 꼴로 새 앨범을 듣는다는 것인데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각 앨범을 한번이라면 모를까 여러 번 들어야 하니 말이다. 그래서 때로는 부담을 느끼기도 한다. 그럼에도 새 앨범 듣기를 계속 하는 것은 새로운 연주자를 알게 되고 그들이 음악에 풀어 놓은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같은 주제 같은 이야기라도 연주자에 따라 그 느낌은 자못 다르다. 악기의 질감부터 멜로디 라인, 화성의 흐름, 연주자간의 균형 등에서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한편 연주자의 입장에서 자신이 하고픈 이야기를 앨범에 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냥 순간의 감정에만 충실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자신의 연주와 음악을 다시 듣고 또 다시 듣는 숙고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감상자와 소통 가능한 길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혼자만 즐거운 앨범이 되거나 정작 자신이 소외된 이야기만 전달하기 쉽다.

그런 차원에서 색소폰 연주자 서보경의 이번 첫 앨범은 내게 사려 깊게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연주자를 만났다는 느낌에 반가웠다.

이 첫 앨범을 서보경은 자신을 마치 영화처럼 상영하는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결과 일기를 쓰듯이 삶의 순간순간에 느꼈던 감정, 경험했던 사건에서 출발해 쓰고 다음은 6곡이 앨범에 담겼다. 그런데 그녀가 앨범에 담은 이야기들은 거창한 주제를 담고 있다거나, 쉽게 경험하지 못할 특별한 사건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

실제 앨범 타이틀 곡인 “나의 꽃(My Flower)”은 나 자신도 고유한 향기를 지닌 꽃이었다는 자각과 내 안의 꽃을 잘 키우며 살겠다는 결심을 담고 있다. “너보다 더(More Than You Know)”도 비슷하다. 자신의 감정 표현에 더욱 더 적극적이고 솔직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한 자신의 새로운 다짐을 담았다. ,

한편 “부모, 어른, 아이(P.A.C)”의 경우 부모와 자식 간에, 어른과 아이 사이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의견과 감정의 차이로 인한 갈등과 이것이 평화롭게 해결되기 바라는 마음을 말하려 했다. 그리고 “58page 마지막 두줄”은 파울로 코엘료의 장편 소설 <연금술사>를 읽다가 제목처럼 58페이지 마지막 두 줄의 문장 “행복의 비밀은 이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보는 것/그리고 동시에 숟가락에 담긴 기름 두 방울을 잊지 않는 데 있도다”에서 깨달은 가족의 중요성을 표현했다.

음악적인 주제도 있다. 앨범의 시작을 알리는 “늘어나는 나무 (Decalcomanie)”는 시간이 남았을 때 악보를 두고 장난을 치다가 발견한 새로운 악상을, “미로(Maze)”는 음악적 새로움을 찾다가 길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에 빠졌을 때 이를 정리하기 위해 순간의 연주 자체에 집중했던 경험을 그렸다.

이렇게 앨범에 담긴 곡들은 자신과 주변 사람을 살피며 얻은 작은 깨달음, 일상을 살며 느낀 작은 감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모두 나는 물론 당신 또한 살면서 겪고 느꼈을 법한 일상적인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이런 평범한 주제와 사건을 곡에 담아 연주하기란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어렵다. 음악마저 평범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주자가 이야기꾼이라면, 그것도 자신을 말해야 한다면 그는 이 소소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과장하라는 것이 아니다. 감상자가 끝까지 귀를 기울여 이야기를 듣고 그것에 공감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보경은 어떻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을까? 먼저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라 해서 색소폰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연주를 음악의 일부로 머무르게 하고 그만큼 동료 연주자들에게 함께 이야기해줄 것을 요청했다.

앨범 첫 곡 “늘어나는 나무”가 대표적이다. 이 곡은 앨범에서 가장 흥겹고 역동적인 분위기를 지녔다. 보통 이 경우 리드 악기가 막강한 존재감을 드러내곤 한다. 요철(Groove) 가득한 연주로 여가 시간에 악보를 가지고 이래저래 재미 삼아 다르게 연주하다가 얻은 즐거운 영감을 표현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보경은 그것을 솔로가 아닌 함께 하는 연주를 통해 드러냈다. “데칼코마니”라는 색소폰과 피아노가 영어 제목처럼 경쾌한 리듬 위에서 짧은 악상을 주고 받는 것을 통해 테마를 제시한 것부터 그렇다. 게다가 그녀의 색소폰 솔로는 흥겨움 속에서도 매우 침착하다. 이한얼의 피아노, 조민기의 베이스, 김종현의 드럼으로 이루어진 트리오가 펑키하게 상승할 때도 그녀는 고역대보다는 중저역대의 음을 더 많이 사용하며 마치 배의 닻처럼 중심을 유지한다.

“미로”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그녀는 “늘어나는 나무”에서 보다는 높은 온도의 연주를 펼쳤다. 하지만 이 곡에서의 핵심은 전통적인 직선적 스타일의 하드 밥 스타일의 그룹 연주에 있다. 음악적 새로움을 찾으려 하다가 “새로움” 자체에 얽매어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을 처음으로 돌아가 가장 기본적인 연주를 통해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결과다. 여기서도 그녀는 피아노와 함께 보폭을 맞추어 테마를 제시하고 솔로 중에도 베이스, 드럼과 손을 맞잡고 같은 길을 가는 한편 피아노와 드럼에게 솔로의 공간을 같이 제공하는 등 그룹 연주에 집중했다.

“More Than You Know”에서도 그녀의 그룹 중심적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보다 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겠다는 의지를 그녀는 흥미롭게도 절제된 연주로 표현했다. 대신 곡의 시작을 베이스에 맡기고 피아노에 자신이 미처 표현하지 못한 화사함을 일임하여 자신의 색소폰과 일종의 대비 효과를 연출하는 것으로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완성했다.

서보경이 자신을 이야기하기 위해 선택한 또 다른 요소는 낮은 톤의 담백한 연주다. 이것은 특히 느린 서정적 분위기의 곡에서 보다 매력적으로 드러난다. “부모, 어른 아이”에서의 연주가 그렇다. 슬픔을 머금은 이 곡에서 그녀는 부드럽고 고운 톤-클라리넷을 연상시키는-으로 매우 담담하게 연주했다. 그래서 곡에 낮게 깔려 있는 비감과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얼핏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이 담담함은 슬픔의 체념이 아니라 갈등이 해소에 대한 희망으로 연결된다. 특히 후반부의 아늑하고 낭만적인 솔로 연주는 그녀가 낮은 목소리의 연주를 펼친 것이 음악적 선택, 그러니까 연주를 통한 자기 표현이 아닌 음악을 통한 자기 표현을 추구한 결과임을 생각하게 한다.

“58 Page 마지막 두줄”에서도 그녀는 결이 고운 맑은 톤으로 사색적으로 연주했다. 그래서 독서 중 특정 문장에서 유레카(Eureka) 같은 깨달음의 번뜩이는 순간보다 그 깨달음이 준 마음의 변화-가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를 느끼게 한다.

그러고 보면 “My Flower”가 앨범 타이틀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곡에서 그녀는 긴장, 비감, 결연함, 낙관 등 다양한 감정의 결을 표현했다. 그렇다고 극적인 상승과 하강을 오가는 연주는 아니다. 여기서도 그녀는 여전히 담담하다. 그런데 이러한 다른 감정의 결들의 이어짐은 그대로 꽃이 개화하는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나아가 보잘것없다고 느꼈던 자신에 대한 연민을 버리고 개성을 지닌 아름다운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는 성장의 과정을 그리게 한다.

결국 서보경이 자신이 주인공이라 해서 자기 중심적, 자기 과시적 연주를 펼치지 않은 것, 동료와 함께 하는 연주를 펼친 것 그리고 너무 겸손하다 싶을 정도로 담담하게 연주한 것은 성숙의 결과인 셈이다. 이 성숙함은 이 앨범에 담긴 소소한 일상의 감정과 경험을 깊은 울림을 지닌 특별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앨범에 대한 소개 글을 쓰고 있지만 나는 그녀를 잘 알지 못한다. 만나본 적도 없다. 그러나 이 앨범을 통해 적어도 그녀가 늘 자신과 삶을 돌아보고 음악과 현실을 고민하며 앞으로 더 나아가기를 꿈꾸는 연주자라는 것은 알겠다. 또한 앞으로도 새로운 주제와 그에 걸맞은 연주와 음악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네리라 예상한다. 그녀의 성장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싶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