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블래키(Art Blakey : 1919.10.10 – 1990.10.16)

자신의 음악을 구현할 줄 알았던 탁월한 리더

애초에 드럼은 전면에 나설 수 없는 악기였다. 이 모두 녹음 기술 때문이었다. 초창기 녹음은 소리를 곧바로 음반에 입력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러니까 가수가 노래를 부르면 이를 날카로운 바늘이 원형의 판에 홈을 내는 것이었다. 테이프에 음악을 녹음하고 이를 기반으로 마스터 판을 제작하는 일은 1950년대에나 가능했다. 아무튼 직접 얇은 음반에 소리를 기록하다 보니 드럼처럼 큰 소리를 내는 악기는 제대로 녹음하기 어려웠다. 드럼의 짧은 진동이 바늘을 튀게 하여 녹음을 망치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창기 녹음 환경에서 드럼은 맨 뒤, 심지어는 아예 커튼 뒤에서 조심스레 연주를 해야 했다.

이렇게 드럼을 맨 뒤에 위치시키는 것은 이후 녹음 환경이 좋아진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래서 이제 드럼은 음악의 맨 아래 부분을 담당하는 악기라는 인상이 강하다.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축구의 골키퍼나 야구의 포수 같다고 할까? 그래서 드럼이 전면에 나선 음악을 만나면 여전히 사람들은 그 음악에 낯설어한다. 그렇기에 드럼 연주자가 인기를 얻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아트 블래키는 예외였다. 그는 드럼 연주자로서 다른 어느 누구보다 높은 인기를 얻었다. 그렇다고 그는 색소폰이나 트럼펫 연주자처럼 사운드의 전면에서 화려한 드럼 솔로를 펼치지도 않았다. 물론 그는 소니 클락이나 맥스 로치 등의 동료만큼이나 탁월한 솔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드럼 솔로를 위해 곡이 만들어지고 편성이 이루어지며 연주가 진행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보다는 모든 악기들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음악을 만드는 것을 먼저 생각했다. 즉, 밴드 중심의 사고를 펼쳤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드럼 연주자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다. 맞다. 하지만 그가 다른 드럼 연주자들과 달랐던 것은 다른 연주자들을 지원하며 묵묵히 리듬을 연주하는 사이드 맨 활동에 그치지 않고 밴드 ‘재즈 메신저스’를 결성하여 자신의 생각하는 음악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려 했다는 데 있다. 그 대표적인 음악이 바로 하드 밥이다. 그렇기에 그는 개인보다는 아트 블래키 와 재즈 메신저스라는 그룹의 차원에서 더 많이 이야기된다. 어쩌면 이 때문에 드럼 연주자로서의 아트 블래키가 상대적으로 덜 관심을 받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미국 펜실베니아 주의 피츠버그에서 태어난 그는 10대 시절부터 지역의 클럽에서 빅 밴드 연주 활동을 했다. 당시 그의 악기는 드럼이 아닌 피아노. 하지만 악보를 볼 줄 몰라 연주에 제약이 많았다. 그래서 결국 후에 스타일리스트로 성장하게 되는 에롤 가너에게 피아노를 양보하고 드럼을 연주하게 되었다.

그가 드럼 연주자로 성장하게 된 것은 드럼 연주자로서 밴드를 이끌었던 칙 웹의 영향이 컸다. 칙 웹은 그에게 화려한 솔로보다는 다양한 템포에서도 리듬감을 명확히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면을 강조했다. 물론 그가 이것에 만족했다면 그는 스윙 시대의 평범한 드럼 연주자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등과 함께 남성 보컬 빌리 엑스타인이 이끄는 밴드에서 활동하면서 그는 솔로 연주자로서의 자아를 확립하게 되었다. 보컬리스트가 드럼에게도 다른 악기들처럼 자신을 드러낼 기회를 제공했던 것이다. (이 빌리 엑스타인 빅 밴드를 두고 사람들은 비밥 양성소라 부르기도 했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1947년 빌리 엑스타인 밴드 출신의 멤버들을 모아 17 재즈 메신저스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이것이 재즈 메신저스의 시작이었다. 이후 퀸텟으로 축소되면서 한동안은 피아노 연주자 호레이스 실버가 리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재즈 메신저스 퀸텟이 자리를 잡자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음악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 인기를 얻고 있던 백인 중심의 가벼운 쿨 재즈와는 달리 비밥 시대의 정교한 화성과 스윙 시대의 경쾌한 리듬, 그리고 비교적 귀에 잘 들어오는 멜로디를 지닌 ‘하드 밥’과 다시 여기에 가스펠적인 요소를 도입하여 흑인적인 성격을 강화한 ‘소울 재즈’의 탄생을 이끌 수 있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음악이 확고했던 만큼 그는 전체 흐름의 강약, 각 솔로 연주의 방향 등을 연주자들에게 제시하곤 했다. 나아가 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여러 연주자들을 직접 찾아 기용하곤 했다. 트럼펫 연주자 케니 도햄, 리 모건, 프레디 허바드, 색소폰 연주자 행크 모블리, 베니 골슨, 웨인 쇼터, 자니 그리핀 등이 그들이다. 심지어 피아노 연주자 키스 자렛도 한동안 그의 지휘 하에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말년에는 트럼펫 연주자 윈튼 마샬리스, 테렌스 블랜차드와 색소폰 연주자 브랜포드 마샬리스, 케니 가렛 등의 영 라이언들에게 기회를 주는 등 평생에 걸쳐 수 많은 연주자들을 찾아 내 그들의 새로운 감성을 수용하고 자신의 숙성된 음악을 전달했다. 그래서 드럼 연주자가 실력파 연주자들의 발굴에 능하다는 전통은 그로부터 생긴 것이라 해도 무방할 듯싶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 특히 동쪽 끝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전설처럼 다가오는 인물이지만 의외로 그는 오래 전에 한국을 다녀갔다. 재즈의 인기가 미약하고 외국 가수나 연주자들의 공연이 많지 않았던 1967년 서울의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공연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 같다. 공연장의 맨 앞 한 줄만 관객이 앉았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것도 무료로 들어온 관계자들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트 블래키와 재즈 메신저스는 느슨함이 없이 최선의 연주를 펼쳤다고 한다. 그것도 관객이 적은 상황을 이용하여 신청곡까지 받아 가면서 말이다.

정말 전설 같은 일이다. 사실 1967년이면 아트 블래키의 음악 인생에 있어서 다소 침체기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그래서 한국까지 올 마음을 먹었던 것일 지도 모른다. 뭐, 그럼 어떠랴? 그의 연주를 눈 앞에서 본다는 것은 전설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의 앨범을 들을 때면 가끔은 1967년 서울 공연을 관람한 몇 십 명의 관객이 부러워진다. 정작 그들은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대표 앨범 

abA Night At The Birdland 1&2 (Blue Note 1954)

아트 블래키와 재즈 메신저스의 첫 번째 앨범은 녹음되자 마자 전설로 자리잡았다. 1954년 2월에 호레이스 실버(피아노), 클리포드 브라운(트럼펫), 루 도날드손(색소폰) 등으로 이루어졌던 이 퀸텟은 마일스 데이비스의 전설적인 퀸텟이 결성되기 전까지 당대 최고의 퀸텟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그 명성에 걸맞게 퀸텟의 연주는 하드 밥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싶을 정도로 훌륭했다. 특히 찰리 파커를 계승한 듯한 루 도날드손과 막 비상 중이었던 클리포드 브라운의 연주는 지금도 유효한 감동이었다. 한편 후에 애시드 재즈에서 샘플링되는 피 위 마케트의 공연 소개 멘트도 앨범을 특별하게 한다.

Moanin’ (Blue Note 1958)

아트 블래키는 물론 재즈 역사를 이야기할 때 꼭 들어야 하는 앨범이다. 그것은 먼저 피아노 연주자 바비 티몬스가 작곡한 타이틀 곡 때문이다. 블루스 스케일을 기반으로 흑인의 노동요에서 차용한 부르고 메기기를 사용한 이 곡은 흑인적인 색채를 더욱 강조하고자 했던 하드 밥의 이상에 부합하는 곡이었다. 여기에 ‘Drum Thunder Suite’ 에서의 아트 블래키의 드럼 솔로 또한 인상적이었다. 한편 이 앨범을 녹음할 당시 베니 골슨(색소폰), 이 모건(트럼펫) 등으로 구성된 재즈 메신저스의 편성이 당대 최고였다는 것도 앨범의 가치를 높인다.

Caravan (Riverside 1963)

아트 블래키는 1962년 10월 블루 노트를 리버사이드 레이블과 계약하고 새로운 활동을 시작했다. 이 앨범은 레이블에서의 첫 앨범으로 발매는 1963년에 되었지만 계약 직후 곧바로 녹음되었다. 이 앨범의 뛰어남은 재능 있는 젊은 연주자를 기용하는 아트 블래키의 혜안에 있다. 웨인 쇼터(색소폰), 프레디 허바드(트럼펫), 커티스 풀러(트롬본) 등이 참여한 편성은 지금으로서는 명인들의 집합이었지만 당시에는 막 주목 받기 시작한 신진들의 모임이었다. 이에 걸맞게 재즈 메신저스의 연주는 모든 면에서 신선했다. 그 결과 앨범은 아트 블래키와 재즈 메신저스가 추구했던 하드 밥의 결정으로 평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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