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ntastic – Trix (King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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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재즈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재즈의 소비에 국한된 것이다. 일본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세계 각국의 다양한 재즈를 소화하고 있다. 그러나 의외로 자국 연주자에 대한 관심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그렇기에 재즈를 생산하는 국가로서의 이미지는 그다지 강하지 않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일본이 자신 있게 내세울만한 자기들만의 재즈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J 퓨전이라 불리는 일본의 퓨전 재즈다. 사실 형식적으로는 일반적인 퓨전 재즈와 그다지 다를 바 없지만 일본의 퓨전 재즈는 한번 들으면 ‘아! 일본산이구나’라고 할만한 그네들만의 무엇이 있다.

이러한 일본만의 퓨전 재즈가 만들어지게 된 데에는 30여 년간 양대 산맥을 이루며 활동해온 티 스퀘어와 카시오페아의 힘이 크다. 전 세계적으로 퓨전 재즈가 초기의 강력한 에너지를 상실하고 나긋나긋한 팝 성향의 음악으로 변화될 무렵에 활동을 시작한 이 두 그룹은 지금까지도 꾸준한 활동을 하며 미국 중심의 퓨전 재즈와는 달리 색소폰보다 기타가 사운드의 전면에 나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자유로운 솔로보다 정해진 패턴의 연주를 촘촘하게 이어나가는 그들만의 퓨전 재즈를 만들고 또 지금까지 이끌어왔다. 실제 현재 일본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이러저러한 퓨전 재즈 그룹들은 직간접적으로 이 두 그룹의 영향을 드러내곤 한다.

이처럼 티 스퀘어와 카시오페아의 음악이 J 퓨전의 전형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단순한 음악적 영향을 넘어 이 두 그룹이 새로운 J 퓨전 재즈 연주자, 새로운 그룹의 양성소 역할까지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J 퓨전 재즈 그룹 가운데에는 Four Of A Kind, Pyramid 등 이 두 원조 그룹을 거친 연주자들의 다양한 조합을 기본으로 만들어진 그룹이 상당히 많다.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앨범의 주인공 Trix도 마찬가지다.

이 4인조 밴드는 지난 2004년 티 스퀘어 출신-결성 당시에는 티 스퀘어에서 활동 중이었다-의 베이스 연주자 미츠루 수토와 카시오페아에서 1992년부터 1996년까지 활동하면서 6장의 앨범을 녹음했던 드럼 연주자 노리아키 쿠마가이가 중심이 되고 여기에 키보드 연주자 히로시 구보타와 기타 연주자 다케시 히라이의 가세로 결성되었다. 그리고 정상급 연주자들로 구성된 만큼 그룹은 첫 앨범 <Index>를 통해 J 퓨전의 전형을 충실히 계승한 시원한 사운드를 제시하며 단 번에 인기를 얻었다.

그런데 나는 이 그룹이 오래 지속되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동안 티 스퀘어와 카시오페아 출신의 연주자들이 함께 했던 그룹들이 대부분 단발성 프로젝트 수준에서 그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시 앨범 <Index>에 대한 리뷰를 여러 잡지에 기고하면서 강한 인상을 남기고 사라질 일회성 그룹이 되리라고 썼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내 예상과 달리 Trix는 그동안 다섯 장의 정규 앨범, 라이브 앨범 한 장 그리고 베스트 앨범까지 발매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계속해왔던 것이다. 다만 첫 앨범 이후 국내에 이들의 앨범이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새 앨범 <Fantastic>은 Trix의 여성 번째 정규 앨범이다. 나 역시 첫 앨범 이후 다른 앨범을 듣지 못하고 있다가 갑작스레 이 앨범을 듣게 되었는데 약 5년 만에 듣는 이들의 현재를 확인한 소감은 그 사이 매력을 잃지 않고 꾸준히 활동해왔구나 하는 것이다. 사실 앨범을 녹음하는 연주자는 앨범마다 변화를 거듭해야 한다는 부담과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는 장점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불안 사이를 오가곤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앨범을 들어보면 그 동안 그룹이 자신들만의 개성을 유지하며 마음 편히 활동을 해왔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들만의 개성이란 바로 솔로와 합주의 즐거움을 동시에 추구하는 연주를 말한다. 보통 우리는 한 연주자의 솔로 연주가 절정을 향해 상승할 때 짜릿한 흥분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번 앨범에서 Trix의 연주는 한치의 오차, 찰나의 어긋남도 허용하지 않는 정교한 합주가 우선적으로 돋보인다. 게다가 합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의 태도는 편곡에서도 그대로 느껴진다. 다채로운 리듬과 숨막힐 정도의 긴박한 템포 변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 사운드가 다소 복잡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곡의 중간 중간에 네 연주자가 모여 유니즌 연주로 방향 전환을 하는 지점을 의도적으로 곳곳에 배치하여 잘 정돈된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네 연주자가 모였다가 풀어지는 과정은 말 그대로 환상적(Fantastic!)하다.

그렇다고 솔로 연주자로서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이미 J 퓨전 재즈계에서 일급연주자로 평가 받고 있는 네 사람인 만큼 곳곳에서 자신들의 역량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Bos(t)on’의 인트로에서는 노리아키 쿠마가이의 드럼 솔로를, ‘Adoration’의 중반부에서는 히로시 구보타의 건반 솔로를, ‘Circulars’의 중반부에서는 미츠루 수토의 베이스 솔로를 만날 수 있다. 물론 다케시 히라이의 기타 솔로는 앨범 전반에 편재한다. 그러나 사실 네 연주자의 뛰어난 역량은 어느 특정 순간이 아니라 곡 전체에 걸쳐 드러난다. 그리고 이 함께 하는 연주가 특정 순간에서의 솔로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합주라는 것이 동시적인 솔로 연주에 가깝기 때문이다. 즉, 단순히 솔로와 반주 역할을 구분하여 연주하는 식의 합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리 주어진 길을 따라가겠지만 비트를 미분하고 순간적으로 이를 변화시키는 드럼, 태핑과 슬래핑을 효과적으로 오가는 베이스, 다채로운 색감의 소리로 사운드의 전체적인 질감을 결정하는 키보드-게다가 그는 9곡의 수록 곡 가운데 6곡의 작곡을 담당하며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시종일관 고속도로를 달리듯 질주하는 기타가 하나의 방향을 향해 동시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Trix의 합주인 것이다. 이처럼 솔로인 동시에 반주의 의미를 띄고 있기에 이들의 합주는 하나의 잼 세션에 가깝다. 사실 주어진 부분에서 자유를 부여 받아 솔로를 펼치는 것보다 연주자 자신과 그룹 전체를 입체적으로 생각하며 연주하는 것이 더 어렵다. 그래서 Trix의 연주, 네 연주자의 동시적인 연주를 듣다 보면 기교의 진정한 끝은 자신만을 돋보이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멤버를 이해하고 그들과 하나된 길을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한편 네 연주자의 기교가 유감없이 드러나면서도 합주가 중심이 되고 있기에 Trix의 음악은 연주자들의 놀이 수준을 넘어 감상자를 사운드의 한 가운데 위치시키는 정서적인 성격 또한 지닌다. 첫 번째 감상에서 네 연주자들의 기교와 합주에 놀랐다면 두 번째 감상에서는 전체 사운드가 주는 느낌에 집중해보기 바란다. 그러면 Trix의 음악이 도시의 복잡한 삶, 그러나 밝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거침 없이 앞으로 질주하는 젊음의 정서를 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8번째 곡 ‘Bos(t)on’을 유의 깊게 들어보기 바란다. 아마 이번 앨범을 그룹의 이전 앨범들과 구분되게 하는 이번 앨범만의 새로움이 아닐까 싶은데 이 곡의 후반부에는 갑자기 네 연주자의 만담이 등장한다. 일본어로 진행되고 있어 한국 감상자들 대부분 이해하기 곤란하겠지만 그 분위기만으로도 네 사람이 익살스러운 만담을 펼치고 있음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내용은 심심하다 싶을 정도로 그리 특별하지 않다. 미츠루 수토가 영어 선생님이 되어 곡의 제목이기도 한 미국의 도시이름 ‘보스톤’이 생각보다 발음하기 어렵다며 다른 세 멤버들에게 한 번씩 발음해 보도록 시킨다. 그래서 히로시 구보타와 다케시 히라이는 발음이 좋지 못하다고 나무라고 노리아키 쿠마가이의 발음이 좋다고 칭찬한다. 이것이 전부다.)

최근 일본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국내에서는 J 퓨전의 인기가 예전만 못한 것 같다. 물론 열혈 마니아 층은 여전히 건재하지만 말이다. 여기에는 앨범 수급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J 퓨전 재즈가 신선한 부분을 많이 잃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중에 이번에 우리에게 선보이는 Trix의 이번 앨범은 J 퓨전의 매력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데 일조하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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