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rfood – Roy Hargrove (EmArcy 2008)

대중적 친화력을 겸비한 쿨한 포스트 밥 사운드

RH

1980년대 후반에 등장한 로이 하그로브는 당시 재즈의 화두였던 신전통주의, 그러니까 하드 밥에 기초하여 재즈가 가장 예술적인 동시에 흑은 음악다웠던 시절을 새로이 되살리고자 했던 흐름을 따르는 “영 라이언”의 한 명이었다. 이것은 그가 신전통주의의 기치(旗幟)를 처음 올렸던 윈튼 마샬리스에 의해 직접 발굴되었다는 것이 큰 이유로 작용했다. (그는 1987년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를 방문한 윈튼 마샬리스 앞에서 인상적인 트럼펫 연주를 펼쳐 프로 연주자의 길을 시작하게 되었다.) 실제 그는 윈튼 마샬리스의 든든한 후원아래 신전통주의, 나아가 포스트 밥을 이끄는 트럼펫 연주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그는 과감하게 신전통주의 혹은 포스트 밥과는 다른 길, 아니 아예 정반대의 길을 선택했다. 그것은 바로 첨단의 일렉트로 사운드와 힙합, 펑키, R&B 리듬이 결합한 새로운 사운드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은 프로젝트 성향의 RH Factor을 통해 실현되었는데 기존 로이 하그로브와는 전혀 다른 사운드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런데 로이 하그로브가 거의 표변(豹變)이라 할 정도로 갑작스레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 것은 비단 그만의 뜻밖의 생각 때문만은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에 조슈아 레드맨, 크리스티안 맥브라이드 등 가까운 동료들도 이런 전자적인 사운드에 관심을 표명했다. 그러니까 일렉트로 펑키 재즈라 부를 수 있는 이 색다른 재즈는 90년대 후반의 주요 유행이었던 것이다. 사실 이 새로운 전자지향적 사운드는 2000년대에 대한 세기말적 불안, 기대, 호기심의 반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나 싶다.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 일렉트로 재즈가 생겼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유행은 과거 신전통주의처럼 하나의 주류를 형성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물론 이 흐름이 아직 진행 중이기는 하지만 그 세(勢)로 보아 주류를 형성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실제 로이 하그로브와 유사한 시도를 했던 동료 연주자들은 이미 어쿠스틱 포스트 밥 사운드로 회귀했다.

로이 하그로브 본인도 마찬가지다. 아니 적어도 다시 한번 그의 음악적 진로에 대해 고민 중인 것만은 확실하다. 이것은 지난 2006년 RH Fsctor의 이름으로 앨범 <Distractions>(2006)을 발표하면서 동시에 어쿠스틱 성향의 앨범 <Nothing Serious>를 사실로도 확인된다. 그리고 이번 앨범 <Earfood>에서 그는 다시 한 번 어쿠스틱 사운드를 들려준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부드러운 멜로디

사실 RH Factor이전에도 로이 하그로브는 변화에 상당한 관심을 두고 있었다. 쿠바 연주자와 함께 쿠반 재즈를 시도한 <Habana>(1997), 현악 앙상블과 협연한 <Monemt To Moment>(1999)가 그 좋은 예라 하겠다. 하지만 이번 앨범의 경우 외적인 변화, 뭔가 다른 새로운 것을 시도했다는 것이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Nothing Serious>에서부터 감지되었던 것을 더 강화해 어깨에 힘을 빼고 편안하게 연주하려 했다는 인상이 더 강하다. 그런데 오히려 변화에 대한 마음을 비운 듯한 이 자세가 이전 새로운 결과를 낳았다. 그것은 쿨-밥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기존 포스트 밥 양식을 따르면서도 정서적으로는 부드럽고 편안한 사운드를 들려준다는 데 있다.

이것은 먼저 선명한 멜로디를 통해 드러난. 기존 로이 하그로브의 연주는 밥의 양식을 그대로 따라 코드의 복잡 다양한 변화를 기반으로 음들의 수직적인 이동이 중심이 되었었다. 그러나 이번 앨범에서는 음들의 전후 관계가 보다 명확한 수평적인 사용으로 멜로디가 쉽게 드러나도록 하고 있다. (물론 코드의 전개 또한 훨씬 단순해졌다. 대신 그 흐름이 보다 명료하다.) 실제 로이 하그로브의 트럼펫을 주의 깊게 들어보면 과장이나 장식을 자제한, 간결하고 담백한 면이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것은 특히 미디엄 템포 이하의 곡에서 잘 느껴진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세 번째 트랙 “Strasbourg St.Denis”와 그 다음에 이어지는 “Starmaker”가 아닐까 싶다. 먼저 “Strasbourg St.Denis”는 프랑스 파리 2구의 한 지하철 역 이름으로 아마 이 구역에 관한 로이 하그로브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인상이 반영한 곡이라 생각되는데 이 곡에서 그는 간결하게 끊어지는 멜로디와 경쾌한 활력으로 프랑스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어지는 “Starmaker”는 아마도 선배 트럼펫 연주자 류 솔로프의 2000년도 앨범 <Rainbow Mountain>에 수록된 연주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는데 부드럽고 온화한 톤으로 테마에 내재된 달콤하면서도 우울한 정서를 그대로 이어가는 연주를 펼친다. 멜로디컬한 로이 하그로브의 모습이 신선하면서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앨범에서 가장 인상적인 곡이다.

워킹 밴드와 함께 만든 자연스러운 흐름이 돋보이는 사운드

한편 로이 하그로브는 이 앨범을 그의 워킹 밴드와 함께 녹음했다. 워킹 밴드란 한 연주자의 공연을 함께하기 위해 결성된 밴드를 말한다. 이 워킹 밴드는 한 연주자의 공연 일정에 따라 짧게는 몇 개월부터 길게는 몇 년까지 함께 한다. 그러므로 한 장의 앨범 녹음을 위해 임시적으로 모인 프로젝트성 밴드와 달리 보다 안정적인 호흡이 장점이다. 따라서 로이 하그로브가 이번 앨범에서 추구하는 어깨에 힘을 뺀 사운드에는 이미 그와 호흡을 맞춰온 워킹 밴드가 가장 적합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로이 하그로브는 앨범에서 리더이기는 하지만 독재자적 모습보다는 RH Factor에서처럼 그룹의 일원으로 자신을 위치시키며 많은 부분을 그가 신뢰하는 연주자들에게 배려하고 있다. 그 결과 이 앨범은 선명한 멜로디, 단순 명료한 코드 진행, 간결한 솔로 외에 각 멤버들의 안정적인 조화 또한 매력이다. 특히 저스틴 로빈슨의 색소폰과 로이 하그로브의 트럼펫이 만들어 내는 대비 효과를 기본으로 하는 조화는 과거 존 콜트레인과 마일스 데이비스의 조화를 생각하게 할 정도로 인상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The Stinger”같은 곡을 들어보기 바란다. 꼭 로이 하그로브가 마일스 데이비스의 상징인 뮤트 트럼펫을 연주해서가 아니라 두 연주자의 솔로에서 느껴지는 온도 차, 그리고 테마에서의 하나됨이 매우 뛰어나다. 한편 곡에 따라 경쾌한 그루브에서 감미로운 시정을 오가며 관악기를 감싸거나 직접 이야기를 이어가는 제랄드 클래이톤의 피아노 또한 주목할만하다.

한편 이 앨범의 사운드는 RH Factor이전의 어쿠스틱 사운드로 돌아간 느낌을 주지만 그렇다고 음악적으로 회귀했다고 볼 수는 없게 한다. 그보다 최근 그의 일렉트로 펑키 사운드 활동이 전반적인 로이 하그로브의 음악에 큰 변화를 주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포스트 밥 사운드지만 이전과 다른 보다 감상자 친화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시적으로 드러나는 이 앨범의 새로운 면들, 대중성으로 이어지는 그 매력들은 사실 RH Factor 활동을 통해 얻어진 체험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렇기에 이번 앨범은 로이 하그로브의 새로운 대중성을 발견하게 해주는 앨범으로 남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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