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blo & Concord Jazz 6

브라질

파블로 레이블은 엘라 핏제랄드, 오스카 피터슨을 중심으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려움을 겪던 메인스트림 재즈 연주자들의 앨범 제작에 힘썼다. 그랬던 만큼 레이블에 모인 연주자들이나 그들의 음악 모두 전통적이었다. 과거의 시간을 지속시키려는 것이었다고 할까? 아무튼 익숙한 만큼 새로움은 덜했다. 산하에 파블로 투데이 카탈로그를 1981년부터 운영했고 매트릭스, 론 로프스키 등 퓨전 재즈 성향의 연주자들이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앨범이나 참여한 연주자들 모두 기존 파블로 카탈로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노먼 그랜츠는 열린 마음으로 자신만을 믿고 모인 연주자들을 색다르게 조합하는 등 카탈로그를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새로운 음악적 시도는 연주자 개인의 노력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다.

라틴 재즈, 보사노바 재즈 연주자와 앨범이 극히 적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파울리뇨 다 코스타, 조르지 벤 등을 제외하고는 엘라 핏제랄드, 조 패스, 사라 본 등 기존 메인스트림 재즈 연주자들의 개인적인 선택에 의해 일회적으로 제작된 앨범 정도가 전부였다.

사라 본과 브라질

그래도 사라 본의 라틴 재즈 앨범은 특별했다. 그녀는 파블로 레이블에서 브라질을 주제로 두 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두 앨범에서 그녀는 브라질 작곡가들의 곡을 노래했다. 브라질 음악에 대한 그녀의 접근은 보다 진지했다. 1977년 그녀는 남미 투어를 떠났다.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칠레, 에콰도르, 페루, 그리고 브라질을 도는 일정이었는데 그 중 브라질에 매료되었다. 브라질 리우를 지구상에서 가장 멋진 곳이라 고 말할 정도였다. 그녀의 브라질 사랑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브라질 관객들의 열띤 호응과 만족스러운 공연에 힘입어 그녀는 브라질을 주제로 한 앨범을 녹음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를 위해 브라질의 앨범 제작자 알로이시오 지 올리베이라에게 앨범 제작을 의뢰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앨범이 바로 이었다.

I Love Brazil!

제작을 노먼 그랜츠가 하지 않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앨범은 파블로 레이블과 상관 없이 기획, 제작되었다. 게다가 1977년 당시 사라 본은 파블로 레이블 소속도 아니었다. 머큐리 레이블 시절 자신의 앨범을 제작했던 밥 셰드가 세운 메인스트림 레이블을 떠나 아틀란틱 레이블로 막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따라서 <I Love Brazil!>은 당연히 아틀란틱 로고를 달았어야 했다. 하지만 레이블은 성공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발매를 거부했다. 심지어 비슷한 시기에 녹음된 앨범 <Songs Of The Beatles>마저 거부했다. 이것은 아틀란틱 레이블과의 계약 해지로 이어졌다. 이 때 노먼 그랜츠가 손을 내밀었다. 사라 본과 노먼 그랜츠는 1948년 재즈 앳 더 필하모닉(JATP) 공연을 함께 한 인연이 있었다.

아무튼 순조롭지 않은 과정을 거쳐 앨범은 파블로 투데이 카탈로그의 첫 번째 앨범이 되었다. 이 앨범을 위해 그녀는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 밀튼 나시멘토, 도리 카이미 등 당대 최고의 브라질 음악인들과 함께 했다. 그런데 그녀가 선택한 방향은 1960년대 큰 유행을 가져왔던 보사노바 재즈의 재현이 아니었다. 그녀가 생각한 앨범은 단순히 보사노바나 삼바 스탠더드 곡들을 노래한 앨범이 아니었다. 그녀는 스스로 1970년대 당시 브라질에서 인기를 얻고 있던 브라질 팝 음악(MPB) 속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그래서 보통 보사노바 재즈 하면 떠오르는 어쿠스틱 기타가 중심이 된 음악이 아닌 전기 기타와 베이스, 그리고 키보드까지 가세한 당대 브라질 팝 음악을 그대로 따랐다. 그 결과 앨범은 보사노바 리듬처럼 부드럽고 잔잔한 해변 휴양지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브라질의 도심을 떠올렸다.

엄밀하게 본다면 이 앨범은 재즈보다는 팝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이 무렵 사라 본은 장르적 모호함에 익숙했다. 메인스트림 레이블 시절 이미 그녀는 팝 히트 곡들을 당대의 감각에 맞추어 노래한 적이 있었고 그 전에도 머큐리 레이블과 그 산하 엠아시 레이블을 오가며 팝적인 앨범과 보다 재즈적인 앨범을 녹음하곤 했었다. 그러므로 사운드의 변화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목소리와 노래였다. 브라질 당대 최고의 작곡가들이 쓴 곡들을 폭 넓은 음역과 성량을 바탕으로 자신만을 위한 곡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브라질 팝 음악을 좋아하고 존중한다는 느낌을 주었지만 그 안에 머무르려 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MBP 속 사라 본이 아니라 사라 본 식 MBP라는 인상을 주었다.

사라 본의 음악을 차근차근 들어온 감상자들에게 이 앨범은 무척이나 색다른 것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라 본 답지 않은 음악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브라질 음악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진심이었다. 이 앨범 이후 그녀는 1979년 다시 한번 알로이시오 지 올리베이라와 함께 <Copacabana>를 만들었다. 그리고 파블로 레이블을 떠나 콜럼비아 레이블 소속이었던 1987년 세르지오 멘데스와 함께 <Brazilian Romance>를 만들었다. 특히 1987년도 앨범은 그녀의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이었다.

칼 제이더와 콩코드 재즈 레이블

같은 해에 시작했고 음악적으로도 메인스트림 재즈를 지향했지만 콩코드 재즈 레이블은 파블로 레이블에 비해 새로운 연주자와 새로운 재즈에 보다 열려 있었다. 그것이 콩코드 재즈 레이블이 지금까지 꾸준히 앨범 제작을 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심지어는 특정 연주자의 앨범 제작 및 홍보를 위해 산하 레이블을 따로 만들기도 했다. 콩코드 재즈 피칸테(Concord Jazz Picante) 레이블이 그랬다. 이 레이블은 비브라폰 연주자 칼 제이더를 위해 설립되었다. 당시 칼 제이더는 칼 제퍼슨이 콩코드 재즈 레이블과 함께 운영하던 콩코드 재즈 페스티벌에 꾸준히 참여하면서 제작자와 인연을 맺었다. 또한 당시 그는 오랜 시간 함께 했던 판타지 레이블을 떠나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맞아 콩코드 재즈 레이블과 계약하고 앨범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도 칼 제퍼슨이 이 비브라폰 연주자를 위해 산하 레이블을 설립한 것은 의외였다. 하지만 이후 콩코드 재즈 피칸테 레이블의 앨범 제작 활동을 보면 칼 제이더는 산하 레이블의 출범에 도화선 역할만을 했을 뿐이고 칼 제퍼슨은 그 이상의 계획을 레이블 출범 당시부터 품고 있었던 것 같다. 폰초 산체스, 에디 팔미에리, 페트 에스코베도, 찰리 버드 등 라틴 재즈를 대표하는 연주자들의 앨범을 꾸준히 제작했으니 말이다.

칼 제이더는 미국 출신으로 가장 성공한 비 라틴계 라틴 재즈 연주자였다. 비 라틴계였던 만큼 그는 라틴 재즈를 라틴 안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하드 밥 스타일과 접목하고 팝 적인 질감을 부여하는 등 다채롭게 변형시켰다. 또한 그의 라틴 재즈는 브라질뿐만 아니라 아프로-쿠반, 멕시코 등을 아울렀다.

한편 그는 1970년대에 들어 이전까지 추구했던 이국적인 질감을 바탕으로 한 편안한 연주에서 벗어나 록적인 면을 가미한 조금은 어둡고 진보적인 스타일의 라틴 재즈를 시도했다. 그리고 콩코드 재즈 피칸테 레이블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면서 다시 50,60년대의 편안한 스타일로 회귀했다.

La Onda Va Bien

콩코드 재즈 피칸테 레이블을 첫 번째 앨범인 1979년도 앨범 <La Onda Va Bien>이 그 시작을 알렸다. 이 앨범은 170년대 이전 그의 음악을 상기시키는 한편 이후 콩코드 재즈 피칸테 레이블에서 펼쳐질 음악의 원형을 제시했다.

이 앨범에서 그는 로저 글렌(플루트), 마크 레바인(피아노) 롭 피셔(베이스) 빈스 라테아노(드럼) 그리고 폰초 산체스(타악기)와 그룹을 이루었다. 모두 그의 워킹 밴드 멤버들로 꾸준히 호흡을 맞춘 사이였다. 이들과 함께 비브라폰 연주자와 그룹 멤버들은 자작곡과 스탠더드 재즈 곡, 다른 라틴 작곡가의 곡 등을 두루 연주했다. 비브라폰 연주자는 자신이 리더이기는 했지만 중심을 혼자 차지하려 하지 않았다. 꽃잎처럼 부드러운 질감으로 전체 사운드를 편안하게 부유하게 만드는 로저 글렌, 피아노, 키보드를 오가며 사운드의 질감을 좌지우지한 마크 레바인에게도 충분한 공간을 할애했다. 때로는 칼 제이더의 비브라폰이 너무 뒤에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룹의 연주는 뜨겁고 화려한 거리 축제와 차분한 살롱을 오갔다. 축제와 살롱은 쿠바의 하바나나 브라질 리우에 위치했다. 50,60의 칼 제이더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렇다고 과거의 재현, 답습에만 그치지 않았다. 80년대를 앞 둔 현대적인 감각 또한 있었다. 로저 글렌이 피아노 외에 키보드를 연주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폰초 산체스의 화려한 라틴 리듬 위로 팝적인 감각을 더한 결과였다. 지금의 누 재즈, 트로피컬 질감의 일렉트로니카 음악의 도시적 질감을 먼저 제시했다고 할까? 그래서 앨범은 해변이 아닌 도시 한 가운데를 그리게 했다.

콩코드 재즈 피칸테 레이블을 출범하게 했지만 정작 칼 제이더는 이 레이블에서 3장의 스튜디오 앨범과 2장의 라이브 앨범만 남겼다. 또한 흥미롭게도 보컬 카멘 맥래와 함께 한 <Heat Wave>는 콩코드 재즈 레이블을 통해 발매했다. 야심 찬 시작과 달리 그의 앨범이 적었던 것은 그가 1982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콩코드 피칸테 레이블은 독자적인 역사를 이어갔다. 지금도 레이블은 폰초 산체스, 티토 푸엔토, 엘리아니 엘리아스 등의 앨범을 제작하며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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