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피터슨과 마리안 맥파트랜드
노먼 그랜츠와 오스카 피터슨
노먼 그랜츠가 파블로 레이블을 설립하며 13년만에 다시 제작자의 길로 들어선 것은 퓨전 재즈의 등장 이후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었던 메인스트림 재즈의 명맥 유지라는 대승적인 목적 이전에 엘라 핏제랄드와 오스카 피터슨을 위해서였다. 그는 이 두 아티스트를 발굴한 뒤 자신이 운영하던 앨범 제작은 물론 공연 등 일체의 음악 활동을 관리하는 매니저 역할까지 수행했다. 버브 레이블을 매각하고 13년간 스위스에 머물며 제작과 거리를 두고 있을 때도 두 사람의 매니저 일은 계속 했다.
1925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태어나 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한 오스카 피터슨은 노먼 그랜츠를 만나며 미국에서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노먼 그랜츠는 1949년 피아노 연주자를 자신이 기획, 운영하고 있던 재즈 앳 더 필하모닉(JATP) 공연을 통해 이 캐나다 출신의 피아노 연주자를 미국 감상자들에게 소개했다. 그리고 자신이 설립한 버브 레이블에서 마음껏 앨범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 결과 오스카 피터슨은 버브 레이블의 대표 연주자로서 최고의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노먼 그랜츠가 버브 레이블을 매각하면서 오스카 피터슨 또한 그의 최고 인기 앨범이 된 <We Get Requests>(1964)를 끝으로 레이블과의 계약을 종료 했다. 이후 그의 앨범은 라임라이트, MPS 레이블 등에서 제작되었다. 음악적으로는 여전히 훌륭했다. 그러나 버브 레이블 시절만큼 풍성하지는 못했다.
다시 비상했던 파블로 시절
파블로 레이블의 설립은 오스카 피터슨에게 다시 날개를 달아주었다. 파블로 레이블에서 그는 전통적인 트리오를 중심으로 스튜디오와 라이브 앨범을 녹음하는 한편 버브 레이블에서 그랬던 것처럼 디지 길레스피, 카운트 베이시, 엘라 핏제랄드, 사라 본, 에디 데이비스, 클락 테리, 스테판 그라펠리, 주트 심스, 해리 에디슨 등 여러 연주자와 함께 했다. 다만 버브 레이블 시절에는 종종 사이드 맨 역할을 했다면 파블로 레이블에서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연주자로서 앨범에 동료들과 이름을 같이 올렸다.
이들 앨범들은 단순히 재즈의 황금기를 거친 연주자들의 재회, 어느덧 향수를 머금은 그들의 음악을 확인하는 것을 넘어 그 음악이 여전히 매력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파블로 레이블의 존재 이유를 입증했다.
파블로에서 녹음된 오스카 피터슨의 앨범들 중 한 장의 앨범을 선택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스튜디오와 라이브, 편성 등으로 나누어 고른다 해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카운트 베이시가 빅 밴드 리더가 아닌 피아노와 오르간 연주자로 함께 한 앨범 <Satch and Josh>(1974), 1978년 기타 연주자 조 패스, 베이스 연주자 NHOP와 트리오 편성으로 했던 프랑스 파리 공연을 담은 앨범 <The Paris Concert>, 1977년 스위스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에서 다양한 편성으로 펼친 연주를 담은 앨범들, 1981년 NHOP와 드럼 연주자 테리 클락과 트리오를 이루어 연주했던 또 다른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 라이브 앨범 <Nigerian Market Place> 등은 피블로 레이블 시절 오스카 피터슨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면 꼭 들어봐야 할 것이다.
A Royal Wedding Suite(1981)

하지만 나는 이들 앨범들을 두고 고민하는 것을 대신해 조금은 색다른 선택을 하기로 했다. 파블로 레이블 시절 오스카 피터슨은 비밥 시대의 화려함을 바탕으로 재즈가 가장 뜨겁고 아름다웠던 시절을 지속시키는 듯한 연주와는 조금은 다른 시도를 간간히 보여주었다. 1980년도 앨범 <The Personal Touch>에서 앤 머레이의 “You Needed Me”, 댄 힐의 “Sometime When We Touch” 등 당시의 히트 팝을 직접 노래까지 부르며 연주한 것, 1986년도 앨범 <Oscar Peterson Live!>에서 “알레그로”, “안단테”, “블루스”로 구성된 “Bach Suites”를 선보인 것이 그렇다.
1981년도 앨범 <A Royal Wedding Suite>도 그 경우에 해당한다. 오스카 피터슨의 곡으로만 채워진 이 앨범은 당시 세기의 결혼식이라 불렸던 영국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스펜서의 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녹음되었다. (그렇다고 공식 의뢰를 받은 것은 아니다.)
앨범 타이틀에는 “조곡(Suite)”이라 적혀 있지만 수록 곡들이 음악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 화려한 빅 밴드가 웅장한 곡이 있는가 하면 스트링 오케스트라가 달콤한 바람처럼 흐르는 곡도 있다. 뜨겁게 질주하는 곡이 있는가 하면 숨을 고르듯 잔잔하게 흐르는 곡도 있다. 가볍게 스윙하는 곡이 있는가 하면 펑키한 요철을 만들어 내는 곡도 있다. 그럼에도 모든 곡들이 결혼식을 주제로 행복한 정서를 공유하고 있어 변화와 변색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한편 이 앨범에서 오스카 피터슨은 피아노 외에 일렉트릭 피아노도 연주했다. 이 부분이 흥미로운데 악기의 질감 차이를 잘 인식하고 그에 맞는 연주를 펼쳤다. 그럼에도 밝고 경쾌하며 낙관적인 오스카 피터슨의 정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확실히 이 앨범에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을 아우르는 현재-이제는 이 또한 과거지만-의 기운이 있다. 이런 분위기는 오스카 피터슨의 이전과 이후의 앨범들 중에서 이 앨범이 유일하다. 그러고 보니 이 앨범은 파블로 레이블에서 1979년부터 새롭게 분류한 “Pablo Today” 시리즈로 발매되었다.
영국에서 온 연주자 마리안 맥파트랜드
파블로 레이블에 오스카 피터슨이 있었다면 콩코드 재즈 레이블에는 마리안 맥파트랜드가 있었다. 마리안 맥파트랜드 또한 미국인이 아니었다. 1918년 영국 슬라우에서 태어난 그녀는 런던에 있는 길드홀 음악 연극학교에서 클래식을 공부했다. 그러나 재즈의 매력에 빠져 재즈 연주자의 삶을 선택했다. 그런 중 코넷 연주자 지미 맥파트랜드를 만나 결혼해 미국으로 건너와 1950년대부터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분위기는 백인에 미국 출신도 아니며 여성인 피아노 연주자에게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동료 연주자들과 평단의 인정을 받았고 대중적으로도 인기를 얻었다. 그녀는 여성도 남성처럼 연주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 하지 않고 여성으로서의 개성과 재즈의 핵심적 특성을 결합하려 했다.
1960년대 아방가르드/프리 재즈가 등장하면서 그녀는 음악적으로 어려움에 빠졌다. 이 난해한 스타일의 재즈에 적응하려 노력했지만 성공적이지 않았다. 그로 인해 줄어든 공연 활동을 대신해 그녀는 교육 활동에 매진했다. 또한 그녀는 라디오 방송 진행도 열심히 했다. 1964년 WBAI-FM에서 게스트 연주자와 인터뷰를 하고 함께 연주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것을 계기로 1978년부터 2011년까지 미국 공영 라디오 NPR에서 “마리안 맥파트랜드의 피아노 재즈”를 진행했다. 이 프로그램에는 매리 루 윌리엄스를 시작으로 수 많은 연주자가 출연했다. 오스카 피터슨도 방송 초기인 1978년 11월에 출연해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연주했다.
마리안 맥파트랜드는 1950년대에는 사보이, 캐피톨, 아르고 등 유명 레이블에서 앨범 녹음을 할 수 있었지만 1960년대에는 디자인, 타임, 세삭 등 작은 레이블을 옮겨 다녀야 했다. 그래서 1969년에는 직접 할시온(Halcyon) 레이블을 설립해 앨범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직접 레이블을 운영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중 1978년 콩코드 재즈 레이블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녀의 라디오 프로그램 “피아노 재즈”를 옮긴 50장이 넘는 앨범들은 별도로 20장이 넘는 앨범을 콩코드 재즈 레이블에서 녹음하며 말년의 불꽃을 피웠다.
From This Moment On (1978)

콩코드 재즈 레이블에서 그녀는 다채로운 앨범 활동을 했다. 매리 루 윌리엄스, 베니 카터, 빌리 스트레이혼, 듀크 엘링턴 등 작곡가를 주제로 한 앨범을 녹음하는가 하면 트리오 편성을 중심으로 솔로와 콤보 편성을 오갔다. 그래서 그녀 또한 한 장의 앨범을 선택하기 어렵다. 적어도 조지 시어링과 함께 한 피아노 듀오 앨범 <Alone Together>(1982), 피아노 솔로 앨범 <Willow Creek And Other Ballads>(1985), 색소폰 연주자 베니 카터가 직접 참여한 <Marian McPartland Plays the Benny Carter Songbook>(1990),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색소폰 연주자 크리스 포터가 참여한 <In My Life>(1993) 등은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필수 리스트엔 콩코드 재즈에서의 첫 앨범 <From This Moment On>도 포함해야 한다. 앨범 타이틀에서 새로운 출발에 대한 그녀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이 앨범은 베이스 연주자 브라이언 토프, 드럼 연주자 제이크 한나가 함께 한 트리오 편성으로 녹음되었다.
그녀의 트리오는 널리 알려진 스탠더드 곡들을 부드럽고 편안하게 연주했다. 1950년대의 열정, 활력을 부드럽게 순화시킨 낭만 가득한 연주였다. 그렇다고 무디게 연주했다는 것은 아니다. 앨범의 매력은 베이스와 드럼이 조금은 분주하게 움직일 때 더 명확했다. 그녀의 피아노 솔로는 동료의 경쾌한 걸음을 한 발 뒤에서 지켜 보듯 여유로웠다. 청춘을 분주하게 보낸 뒤 평온을 찾은 60대 연주자 다운 연주였다. 그래서 앨범은 연주의 즐거움과 함께 느긋하고 정감 있는 분위기를 동시에 느끼게 했다.
사실 지금은 이런 스타일의 연주는 너무나도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하지만 분위기에 연주를 매몰시키지 않은, 연주에서 자연스럽게 편안한 분위기가 형성되는 연주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이 앨범은 그 모범으로 지금도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