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정서적 여정의 기록
음악을 듣는 것은 여행과 같다. 음악을 통해 감상자는 익숙한 곳이건 미지의 곳이건 다른 곳을 향한다. 음악이 멜로디, 리듬, 화성의 합을 넘어선 무엇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상상의 여행 수단으로서 음악은 감상자뿐만 아니라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음악인에게도 작용한다. 그들의 음악만들기는 새로운 멜로디를 만들고 사운드를 구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자기 안의 무엇이건 상상의 무엇이건 (시간을 포함한) 공간에 대한 상상을 반영한다.
기타 연주자 도미닉 밀러가 ECM 레이블에서 발표하고 있는 앨범들이 좋은 예이다. ECM에서 음악 활동을 하면서 그는 다양한 방식의 여행자의 시선이 담긴 음악을 선보여왔다. 2017년에 발표한 앨범 <Silent Light>에서는 재즈, 팝, 라틴 음악을 아우르는 솔로 연주로 그간 자신이 지나온 음악 여정을 차분히 되돌아보았으며, 2019년에 발표한 앨범 <Absinthe>에서는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남 프랑스와 그곳에서 그림을 그렸던 화가 반 고흐를 중심으로 한 인상주의적 햇살, 공기를 말 그대로 그려냈다. 이를 통해 감상자는 음악을 들으며 다채로운 여정을 상상할 수 있었다.
이번에 새로이 발매된 앨범도 그렇다. 이번 앨범은 아예 “방랑”이라는 타이틀부터 감상자를 한 곳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이것은 앨범에 담긴 8곡이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부터 느낄 수 있다. 게다가 그가 산책 중에 들리게 되는 현지인과 어울릴 수 있는 숨겨진 바 이름에서 가져왔다는 “밀항자(Clandestin)”나 남 프랑스의 한 마을 이름인 “Vaugines”나 스페인 발렌시아지역의 작은 도시인 “Altea”같은 곡은 제목에서부터 은밀하고 낯선 여정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 도미닉 밀러는 자신을 방랑자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한 장소에 머무르며 매일 같은 사람들을 보는 것보다 이동하는 삶을 선호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도미닉 밀러가 실제의 여행을 음악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아니다. 수록 곡들을 어던 가상의 여정을 상정하고 배열하지 않았다. 이 앨범은 코로나 19 펜데믹이 한참이던 2021년에 녹음되었다. 당시 보통의 사람들처럼 그 또한 여행을 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 하에 만들어진만큼 이번 앨범은 심리적인 여행에 가깝다. 그 여행은 시간에 따라 이동하는 여정이 아니라 독립적인 풍경의 나열에 가깝다. 기타 연주자는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풍경 사이를 이동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앨범에 담긴 곡들은 무척이나 정적이다. 전체적으로는 변화하지만 같은 곳을 맴돌며 천천히 나아가는 듯한 “Open Heart”, 멜랑콜리한 서정으로 가득한 “Cruel But Fair”나 “Lonely Waltz”는 물론 진행의 느낌이 강한 “All Change”조차 동적이기보다는 정적인 느낌이 강하다.
또한 앨범에 담긴 여정은 심리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아버지와 자신의 삶에 대한 추억의 여행이다. 도미닉 밀러는 이번 앨범의 정조를 함축하고 있는 타이틀을 영국 시인 존 메이스필드의 시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이 시인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여기에 수록 곡 중 “Mi Viejo”는 나이든 내 아버지를 의미한다. 이 때 방랑과 아버지는 그대로 기타 연주자가 지내온 삶의 여정으로 연결된다. 그의 아버지는 미국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아일랜드 출신이었다. 그리고 출생은 아르헨티나에서 했다. 이후 유년 시절은 미국에서 공부는 영국에서 그리고 현재는 프랑스에 정착했다. 직접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앨범에 담긴 방랑은 그가 직접 체험한 복잡하고 다양한 삶의 여정을 반영한다.
한편 이번 앨범을 위해 그는 <Absinthe>에서도 함께 했던 베이스 연주자 니콜라스 피즈만 외에 건반 연주자 야콥 칼존, 드럼 연주자 지브 라비츠와 새롭게 쿼텟을 구성했다. 이 쿼텟은 “All Changes”처럼 완벽한 그룹 연주를 펼치고 때로는 “Altea”처럼 자유로운 움직임으로 공간 확장적인 모습을 보였다. 작곡 당시에 각 곡마다 상정된 서사, 풍경을 반영한 결과다.
그 결과 이 앨범은 멜로디나 득정 곡에 집중하게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각 곡들에서 피어난 분위기와 그들이 모여 만들어낸 서정적 여정에 집중하게 한다. 그래서 LP를 의식해서 인지 30분이 조금 넘은 전체 시간을 아쉽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