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라 핏제랄드와 로즈마리 클루니
엘라 핏제랄드와 노먼 그랜츠
엘라 핏제랄드에게 있어 제작자 노먼 그랜츠는 날개와 같았다. 빅 밴드 재즈의 인기가 시들해질 무렵 데카 레이블에서 솔로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1940년대 중반 노먼 그랜츠를 만나며 본격적인 성공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노먼 그랜츠는 엘라 핏제랄드의 매니저로서 그녀의 활동을 관리했다. 노먼 그랜츠가 1956년 버브 레이블을 설립하게 된 것도 당시 데카 레코드와 계약이 끝난 엘라 핏제랄드의 앨범을 제작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상황을 노먼 그랜츠가 바꿔주었다. 그는 탁월한 기획력으로 엘라 핏제랄드를 당대 최고의 보컬, 노래의 영부인(The First Lady Of Song)으로 이끌었다. 특히 <Ella Fitzgerald Sings the Cole Porter Song Book>을 시작으로 리차드 로저스, 듀크 엘링턴, 어빙 벌린, 조지 거쉰, 해롤드 알렌, 제롬 컨 등 스탠더드 곡을 쓴 대표 작곡가들의 곡을 노래한 8장의 “Songbook” 앨범은 높은 인기를 얻으며 재즈 보컬의 교과서가 되었다.
노먼 그랜츠가 버브 레이블을 MGM사에 판 뒤에도 엘라 핏제랄드는 레이블에 남아 앨범을 계속 녹음했다. 노먼 그랜츠 또한 레이블을 팔았지만 그녀의 앨범 제막은 계속 했다. 하지만 1967년 엘라 핏제랄드와 버브 레이블의 계약이 끝나면서 상황은 안정적이지 못했다. 이후 엘라 핏제랄드는 5년여간 캐피톨, 리프라이스, 아틀란틱 등의 레이블을 옮겨 다녀야 했다.
그런 중 노먼 그랜츠가 다시 파블로 레이블을 만들고 이에 엘라 핏제랄드가 합류하면서 상황은 다시 안정적이 되었다. 파블로 레이블에서 엘라 핏제랄드는 20여장의 앨범을 남겼다. 그 중 절반은 라이브 앨범이다.
1973년 조 패스와 함께 한 듀오 앨범 <Take Love Easy>로 파블로 레이블에서의 활동을 시작했을 때 그녀는 50대 후반이었다. 이후 1989년 만 72세의 나이로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 <All That Jazz>을 녹음할 때까지 약 16년을 활동했다. 비교적 긴 시간이긴 했지만 1973년 무렵부터 엘라 핏제랄드는 노쇠의 징후를 드러냈다. 목소리는 조금 두껍고 거칠어졌으며 호흡도 짧아졌고 매력적인 비브라토도 다소 무른 느낌을 주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노래를 멈추는 대신 이런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최선의 노래를 이어갔다.
Ella In London (1974)

파블로 레이블에서 녹음한 그녀의 대표 앨범을 이야기한다면 대략 한 장의 스튜디오 앨범 <Take Love Easy>(1973), <Fine and Mellow>(1979)와 라이브 앨범 <Ella In London>(1974)이 될 것이다. 다시 그 가운데 한 장을 고른다면 나는 <Ella In London>을 선택하고 싶다.
이 앨범은 1974년 4월 11일 영국 런던의 로니 스콧 재즈 클럽에서 있었던 공연을 담고 있다. 이 공연에는 당시 그녀와 활동하고 있던 피아노 연주자 토미 플래나간, 기타 연주자 조 패스를 중심으로 베이스 연주자 키터 베츠, 드럼 연주자 바비 더햄이 가세한 쿼텟이 함께 했다.
공연인 만큼 엘라 핏제랄드는 높은 온도로 노래했다. 그리고 자유로운 스캣으로 감상자를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게 하지 않았다. 밴드 소개에 이어 시작된 첫 곡 “Sweet Georgia Brown”부터 그렇다. 거칠고 건조하며 고음에서는 갈라지는 듯 위태로운 목소리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부른 그녀의 노래는 상승과 하강을 거듭하는 롤러코스터처럼 아찔한 감흥을 선사한다.
“The Man I Love”에서는 느린 템포로 시작해 관객과 호흡하면서 서서히 스윙의 온도를 높이고 중간에 “Diamonds Are a Girl’s Best Friend”와 “Fine and Mellow”를 정교하게 섞어 “사랑하는 남자”의 이미지를 위트 있게 비틀어 공연에서만 가능한 감흥의 순간을 연출했다. 평범한 관악기 연주자를 능가하는 스캣 솔로와 “You Are My Sunshine”, “You Are The Sunshine Of My Life”를 섞어 노래한 “Lemon Drop”도 마찬가지다. 또한 “It Don’t Mean A Thing (If It Ain’t Got That Swing)”에서는 관객과 소통하며 컨트리 웨스턴 스타일의 스캣, 소울 스타일의 노래, 카운트 베이시, 듀크 엘링턴 스타일의 피아노 연주와 “Take The A Train”을 차용한 후 본격적인 노래를 시작해 스윙 외에는 의미가 없다는 곡 제목의 의미를 다각도로 생각하게 했다.
여기에 이상하게 영국에서만 노래하게 된다는 “Everytime We Say Goodbye”와 당시 인기를 얻고 있었던 캐롤 킹의 “you’ve Got A Friend”는 공연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또한 관객의 신청곡이라며 조 패스의 기타 만을 대동하고 “The Very Thought Of You”를 노래해 공연 전체를 극적인 드라마처럼 만들었다.
사실 이 앨범의 녹음은 그리 훌륭하지 못하다. 악기 간의 균형도 그리 맞지 않고 전체 사운드 또한 선명하지 않다. 공연 현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엘라 핏제랄드의 노래와 무대 장악력, 쿼텟의 뛰어난 연주는 보석 같다.
콩코드 재즈에서 재기에 성공한 로즈마리 클루니
파블로에 엘라 핏제랄드가 있었다면-물론 다른 보컬도 있었다-, 콩코드 재즈에는 로즈마리 클루니가 있었다. 로즈마리 클루니(1928년생)와 엘라 핏제랄드(1917년생)는 11살의 나이차가 있었지만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했다. 다만 로즈마리 클루니는 일반적인 백인 보컬들이 그랬듯이 재즈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팝적인 성향을 드러내곤 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스스로 자신을 빅 밴드 감성을 지닌 달콤한 노래를 하는 가수라 정의했다.
1950년대 초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그녀는 콜럼비아, MGM, 코랄, RCA 빅터, 리프라이스, 캐피톨 등 여러 레이블을 옮기며 앨범 활동을 했다. 그녀의 앨범들은 경우에 따라 편차가 있기는 했지만 그녀를 인기 재즈 보컬로 인정 받게 해주었다. 그렇게 앨범 녹음을 계속 했어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1964년 빙 크로스비와 함께 녹음한 앨범 <That Travelin’ Two-Beat>이후 그녀는 약 8년간 활동을 멈춰야 했다. 이유는 우울증과 이로 인한 수면제와 신경 안정제 등 약물 중독 때문이었다. 그녀의 우울증은 실패로 끝난 결혼 생활, 직접 선거 운동에 참여할 정도로 친했던 케네디 대통령의 죽음 등 그 무렵 그녀에게 발생한 일련의 불행한 사건들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그녀는 관객에게 갑자기 욕설을 내뱉을 정도로 주체할 수 없는 신경증에 걸렸다. 그 결과 정신 병원에서 치료를 위해 오랜 시간 치료를 받아야 했다.
신경증을 극복하고 1976년 그녀는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레코드에서 두 장의 앨범을 녹음하면서 복귀를 알렸다. 두 앨범에서 그녀는 역시 재즈보다는 팝 적인 맛이 강한 노래를 불렀다.
변화는 콩코드 재즈와 계약하면서부터 일어났다. 제작자 칼 제퍼슨은 그녀의 대중적인 매력은 유지하면서도 그녀를 재즈로 이끌었다. 또한 거의 매해 그녀의 앨범을 제작해 그녀를 이전에 인기를 얻었다가 복귀한 보컬보다는 이제 전성기를 시작한 보컬로 자리잡게 했다. 이에 걸맞게 로즈마리 클루니는 나이가 들어 노쇠했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오랜 시간 쉬었기 때문일까? 늘 안정적이고 편안한 목소리를 유지했다.
콩코드 재즈는 과거 버브 레이블이 엘라 핏제랄드에게 했던 것처럼 로즈마리 클루니를 적극 지원했다. 특히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약 10년에 걸쳐 아이라 거쉰, 콜 포터, 해롤드 알렌, 어빙 벌린, 지미 반 휴센, 자니 머서, 리차드 로저스 등의 스탠더드 작곡가들을 주제로 한 “Songbook” 앨범들은 그녀를 콩코드 레이블의 대표 보컬이자 80년대의 인기 보컬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한편으로 과거 엘라 핏제랄드가 했던 길을 뒤늦게 따랐다는 인상도 준다.)
Rosemary Clooney Sings the Lyrics of Johnny Mercer (1987)

사실 콩코드 재즈에서 녹음된 그녀의 앨범들은 편성과 스타일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유사한 느낌을 준다. 마치 그 모든 앨범을 한 번에 녹음한 것처럼 생각될 정도로 고른 수준, 일관된 질감을 지녔다.
그럼에도 한 장의 앨범을 골라야 한다면 1987년에 녹음한 앨범 <Rosemary Clooney Sings the Lyrics of Johnny Mercer>를 선택하고 싶다. 대부분의 “Songbook”앨범이 특정 작곡가를 주제로 하는 것과 달리 이 앨범은 작사가 자니 머서를 주제로 했다. 그 결과 작사가가 직접 작곡한 곡들은 물론 해롤드 알렌, 데이빗 래스킨, 호기 카마이클 등 여러 작곡가들의 곡이 수록되어 다채로운 느낌을 주었다. 또한 자니 머서의 유작에 배리 매닐로우가 멜로디를 입힌 “When October Goes” 같은 비교적 최신 인기곡까지 노래해 같은 주제의 다른 앨범과 차이를 느끼게 했다.
이 곡들을 그녀는 전곡을 편곡한 피아노 연주자 존 오도를 비롯해 기타 연주자 에드 비커트 등의 지원 속에 노래했다. 이들 연주자들은 하나의 편성을 고집하지 않고 곡에 따라 변화를 주었다. 특히 스콧 해밀튼의 색소폰, 워렌 바쉐의 코넷 등 관악기의 조합이 다채로운 질감을 만들었다.
굳이 정의한다면 쿨 재즈에 속하는 부드럽고 안정적인 연주를 배경으로 로즈마리 클루니는 자니 머서의 가사를 따라 마치 연기하듯 감정을 넣어 노래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모든 노래는 너그러움, 느긋함, 사랑 등 긍정적 감성으로 가득했다. 그것이 앨범을 전통적이지만 과거를 향하지 않고 현재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 만들었다.
한편 “I Remember You”와 “P.S. I Love You”는 오리지 에드 비커트의 기타만을 대동하고 노래했는데 편성은 물론 내밀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이에 앞섰던 엘라 핏제랄드와 조 패스의 조합을 떠올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