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의 노력 끝에 개화(開花)된 연주와 음악
드럼 연주자 홍선미는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드럼을 공부하러 떠난 길이 아예 그곳에 정착해 전문 연주자의 삶을 사는 것으로 이어졌다. 분명 그 시간은 그리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그녀의 음악 여정은 좋은 방향으로 잘 나아가고 있다. 듀오부터 퀸텟까지 다양한 편성의 밴드 활동을 하면서 네덜란드는 물론 한국과 유럽 등에서 공연을 이어가고 있으며 네덜란드 재즈 컴페티션 우승(2018), 네덜란드의 그래미 상이라 불리는 에디슨 어워드에서 국내(?) 재즈 부문 상 수상(2021) 등 음악적 역량을 인정 받았으니 말이다.
특히 그녀의 음악적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홍선미 퀸텟의 이번 세 번째 앨범은 현재까지 그녀가 거친 여정의 한 시기를 정리하고 보다 넓은 세계로의 도약을 담고 있다고 할 만하다. 그것은 이번 앨범에 담긴 연주와 사운드가 이전 두 앨범의 연장선상에 놓이면서도 한층 안정적이고 균질한 모습을 보인다는데 있다. 일단 웨인 쇼터의 이지적인 면을 계승하는 듯 하면서도 순간의 감흥에 보다 의지해 만들어진 음악은 이번 앨범에서도 매력을 발한다. 피아노 연주자만 바뀐 동일한 편성과 연주자에 앨범 타이틀을 “Third Page”라 명하면서 이전 두 앨범과의 연결점을 명확하게 밝힌 것도 이 때문이리라.
하지만 정서적인 면은 좀 다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된 면을 보인다. 그리고 그 변화는 단순한 차이를 넘어 긍정적인 발전을 의미한다. 지난 두 앨범에서 홍선미는 자신의 과거와 자신의 정체성을 정리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한국적인 면과 유럽적인 면이 혼재되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런데 자신의 유럽 생활 10년을 정리하는 의미를 지닌다는 이번 앨범은 그녀가 자신을 규정하던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음을 생각하게 한다. 보다 현재를 수용하고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고 할까? 한층 안정적이다. 긴장을 바탕으로 한 자유로운 연주임에도 잘 구성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홍선미를 비롯한 연주자들이 긴장을 기꺼이 즐긴다고 할까? 일상적인 흐름과 다른 길을 가는 듯하지만 그것이 위태롭거나 불안해 보이지 않는다. 주어진 안정적인 정착지를 향해 나아간다.
자유로우면서도 역설적으로 안정적인 분위기는 오랜 시간 함께 한 연주자들의 호흡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홍선미의 연주에 있는 것 같다. 그녀의 드럼은 시간의 흐름을 주지시키고 그 흐름의 미묘한 음영을 반영하는 것에서 나아가 아예 그 흐름을 감싸고 이끈다. 그래서 여러 결이 겹쳐진 듯한 음악은 의뢰로 서정적으로 다가온다. 실제 영향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폴 모션이 생전 보여주었던 회화적인 연주가 그녀에게서 새로이 발현된 것만 같다. 마음 먹고 즉흥 연주로만 채운 “Screams Like Vapours”조차 그림처럼 다가온다.
한 연주자가 오랜 시간에 걸쳐 성장하는 것을 보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다. 꾸준히 자신에 충실한 음악을 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이어가는 연주자의 과정을 따라가는 감상은 개별 앨범의 감상과는 또 다른 음악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홍선미가 바로 그런 경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