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만에 공개되는 일기 같은 피아노 솔로 연주
세상을 떠난 연주자들 중에는 조금 더 살았다면 지금의 재즈는 다른 모습이 아니었을까? 가정하게 만드는 연주자가 있다. 피아노 연주자 에스뵤른 스벤슨도 그 중 한 명이다. 1964년 생의 이 스웨덴 출신 피아노 연주자는 2008년 6월 14일 스쿠버다이빙을 하던 중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만 44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는 베이스 연주자 단 베르글룬트, 드럼 연주자 마그누스 외스트룀과 트리오(E.S.T)를 이루어 이전까지 없었던 새로운 음악을 선보였다. 델로니어스 몽크, 키스 자렛 등 선배 연주자들의 그림자에서 출발해 록의 강렬함, 일렉트로니카의 우주적 질감을 섞어 놓은 트리오의 음악은 분명 기존 피아노 트리오의 음악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에 감상자들은 열광했다. E.S.T 의 스타일에 영향을 받은 연주자들도 여럿 등장했다. 그러나 E.S.T 이상의 무엇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더욱 피아노 연주자의 사망을 아쉬워하게 했다.
이를 달래듯 2008년 6월 이후 E.S.T의 유작 앨범, 미공개 라이브 앨범 등이 발매되었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지울 수 없었다. 같은 시기에 녹음되어 분리 발매된 두 장의 유작 앨범 <Leucocyte>(2008), <301>(2012)은 몰라도 다른 라이브 앨범들은 좋았던 시절을 추억하게 하는 것 이상의 새로운 무엇은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랴. 그는 이미 세상에 없는 것을.
그런 중 이번에 발매된 새 앨범은 더 이상 새로운 앨범은 없으리라 믿고 있던 애호가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기 충분하다. 게다가 트리오가 아닌 솔로 앨범이라니! 이 앨범은 에스뵤른 스벤슨이 2008년 봄 그러니까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홈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솔로 연주를 담고 있다. 그의 아내가 남편이 남긴 여러 녹음물을 정리하던 중 “Solo”라고만 적힌 흠집 많은 CD와 손상된 녹음 파일을 발견하고 이를 E.S.T의 앨범을 녹음했던 엔지니어 오케 린톤이 세심히 발굴하고 정리한 결과라 한다.
글쎄. 과연 에스뵤른 스벤슨이 이 녹음을 앨범으로 발매할 마음이 있었을 지는 의문이다. 새 트리오 앨범을 구상하며 스케치 형태로 연주한 것일 지도 모른다. 제목도 없다. 앨범에 적힌 각 트랙의 제목은 평소 피아노 연주자가 천문학을 좋아했던 것을 떠올려 그리스 문자를 순서대로 사용한 것으로 큰 의미는 없다.
피아노 연주자의 의도가 어쨌건 이번 앨범에 담긴 음악은 피아노 연주자 에스뵤른 스벤슨을 다시 보게 만든다. 트리오와 전혀 다른 질감의 연주이기 때문이다. 우주적 상승과 하강을 극적으로 오가던 트리오와 다른, 어찌 보면 매우 소박하고 평범한 피아노 연주다. 자연인 에스뵤른 스벤슨의 모습을 담고 있다고 할까? 곡에 따라서는 전혀 다른 사람의 연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이유는 피아노 연주자가 여러 음악적 영향을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Gamma”나 “Eta”는 여러 모로 키스 자렛을 보다 직접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또한 “Zeta”나 “Iota”는 낭만주의와 바로크 시대 클래식 음악의 영향이 보인다. 이 모두 E.S.T 속에서는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방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소 어두운 서정미나 부드럽게 부유하는 듯한 상상력의 전개는 분명 에스뵤른 스벤슨의 것이다.
나아가 “Alpha”, “Delta”, “Epsilon”, “Theta” 같은 연주에서는 솔로 연주 자체로도 좋지만 E.S.T를 상상하게 한다. 한 해 전 녹음했던 <Leucocyte>, <301> 이후 새 앨범의 스케치가 아니었나 생각이 들 정도로 연주 사이사이로 단 베르글룬트와 마그누스 외스트룀의 강렬하고 전자적인 움직임을 그려보게 한다.
이 앨범은 에스뵤른 스벤슨의 공개하고 싶지 않았던 일기라 할만 하다. 그는 이 솔로 연주를 아내조차 모르게 녹음했다고 한다. 손상된 파일, 재생이 어려울 정도로 흠집 많은 CD에 담겨 사라져도 좋았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녹음은 이렇게 14년이 지나 공개되었다. 이를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분명한 것은 이 앨범이 그의 음악적 폭과 깊이가 얼려진 것보다 더 넓고 깊었으며 섬세했음을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를 더욱 그리워하게 한다는 것이다. 정말 그가 조금 더 살았다면 지금과는 다른 재즈의 지형도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