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적이지만 조화로 가득한 북유럽식 즉흥 연주
베이스 연주자 아릴드 안데르센은 지금까지 다양한 편성을 통해 재즈의 자유로움과 모국 노르웨이의 자연미 가득한 포크적 정서가 어우러진 음악을 선보여왔다. 그러면서도 함께 하는 연주자들의 개성을 존중하고 이를 수용해 새로운 음악적 변화로 활용했다. 그만큼 그에게는 함께 하는 연주자들이 중요했다. 케니 휠러, 빌 프리셀, 폴 모션을 비롯한 ECM의 이끈 여러 연주자들이 그와 함께 하게 된 것이 그렇다.
2000년대 후반부터 베이스 연주자는 색소폰 연주자 토미 스미스, 드럼 연주자 파올로 비나치아와 트리오를 이루어 활동했다. 피아노가 없는 이 트리오는 탄탄한 호흡과 치열한 즉흥 연주가 어우러진 포스트 밥 스타일의 연주를 들려주었다. 역시 함께 한 연주자의 개성을 활용한 경우라 하겠다.
그렇게 15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2021년 11월아릴드 안데르센은 새로운 그룹을 만들었다. 색소폰 연주자 마리우스 네셋, 피아노 연주자 헬게 리엔, 드럼 연주자 호콘 미오셋 요한센이 함께 한 쿼텟이었다. 그룹 멤버 전원이 노르웨이 출신이라는 점에서 그동안 아릴드 안데르센의 음악에 꾸준한 관심을 가져온 감상자들은 베이스 연주자가 다시 시정 넘치는 북유럽 스타일의 재즈를 하려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이 앨범을 듣고 당황할 것이다. 자유로운 즉흥 연주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앨범은 특별한 약속 없이 네 연주자가 순간의 감흥에 따라 어울려 만들어낸 연주를 담고 있다. “Affirmation”이란 제목으로 23분과 14분에 걸친 두 차례의 연주인데 각각의 연주는 4개와 3개로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끊김 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같은 날 진행되어서 인지 “Part II”의 트랙 구분이 1부터 새로이 시작하지 않고 “Part I”에 이어 5부터 시작되는 것이 흥미롭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유 즉흥 연주라는 말에 네 연주자들이 일체의 규칙을 거부하듯 전방위로 순간의 감흥을 분출하는 연주를 펼쳤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파편들이 나뒹구는 사건의 현장같은 연주를 기대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전 토미 스미스, 파올로 비나치오와의 트리오 연주보다 한층 정돈된 온건한 연주이니 말이다. 보통 생각하는 자유 즉흥 연주가 원점에서 멀어지려 노력하는 느낌이 강하다면 이 그룹의 연주는 어디인지 모르는 고향을 찾아 회귀하려는 듯 하다. 그래서 막연함 가득한 공간에서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고 숨결을 들으며 차근차근 보조를 맞추어 나간다. 그 결과 네 악기는 동시에 자기 중심적 소리를 내는 대신 순간 먼저 떠오른 동료 연주자의 연주를 따라 리듬을 만들고 화성을 만들어 있던 곡을 연주하는 듯 편안하게 시간을 가로지른다. 색소폰이 강박적으로 몇 개의 음을 반복하면 여기에 피아노가 두께를 입히고 베이스와 드럼이 운동성을 부여한다. 그러다가 피아노가 화려하게 멜로디와 화성을 풀어 놓으면 색소폰과 베이스, 드럼이 그 사리를 걷고 뛴다. 이러한 중심의 변화는 그대로 음악을 살아 숨쉬는 듯 꿈틀거리게 한다.
그룹의 연주는 피아노 연주자 키스 자렛이 솔로 콘서트에서 우연히 떠오른 특정한 몇 개의 음, 몇 개의 코드를 바탕으로 그 자리에서 조화로운 연주를 이어갔던 것의 확장형이라 할만하다. 물론 혼자가 아니라 그룹이기에 순간적으로 조화로운 길을 찾아내는 것이 더 어려울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상투(常套)에 의존한다고 해도 기본적으로는 상당한 교감이 필요하다. 이 그룹은 이전에 공연을 한적은 거의 없지만 더구나 완전 즉흥 연주를 함께 한적이 없지만 그래도 함께 연주, 연습을 한적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자유롭지만 호흡이 착착 들어맞는 연주가 나온 모양이다. 순간에 의지한 속에서 북유럽의 냉랭한 공기가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아무튼 순간적이라 하지만 솔로 연주보다 어울림에 먼저 끌리는 연주다.한편 앨범에 담긴 녹음은 그룹의 스튜디오 녹음 두 번째 날에 이루어졌다. 첫 날에는 아릴드 안데르센이 준비한 곡들을 연주한 것 같다. 애초에 나를 비롯한 아릴드 안데르센의 애호가들이 예상했던 북유럽 시정으로 가득한 연주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번 앨범 마지막에 마치 앙코르 곡처럼 담긴 서정적인 “Short Story”가 이를 기대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