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드 테일러(Creed Taylor, 1929.05.13 ~ 2022.08.22)

재즈사의 변화를 이끌었던 위대한 제작자 세상을 떠나다.

지난 8월 22일, 음반 제작자 크리드 테일러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93세. 8월 2일에 찾아온 뇌졸중으로 인한 합병증이었다.

재즈 음반 산업은 재즈를 사랑하며 추진력 있는 개인 제작자들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음악적 비전과 취향을 지닌 제작자들이 사비를 털어 레이블을 만들고 개성 있는 연주자를 발굴한 덕에 지금의 다양한 지형도를 이룰 수 있었다. 대형 음반사도 재즈 앨범을 제작했지만 재즈가 아니라 대중 음악의 입장에서 상품성 높은 연주자나 보컬을 우선에 두었기에 일관적인 무엇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유통과 경제적 한계로 사라질 위험에 있는 레이블을 인수하기도 했지만 그 순간 레이블의 독창적 성격은 사라지곤 했다.

크리드 테일러는 독립 레이블의 흥망성쇠와 대형 음반사 산하 재즈 레이블의 장단점을 두루 경험한, 재즈 역사상 뛰어난 제작자 중의 한 명이었다.
1929년 5월 13일 미국 버지니아주의 린치버그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재즈를 좋아해 고교 마칭 밴드에서 트럼펫을 연주하기도 했다. 심리학을 전공하기 위해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더럼 시에 있는 듀크 대학을 선택한 것도 이 학교가 듀크 앰버서더(Duke Ambassadors), 파이브 듀크즈라는 학생 밴드가 있었던 것, 그리고 당시 자신의 빅 밴드를 이끌며 인기를 얻고 있었던 레스 브라운이 다녔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듀크 앰버서더의 멤버로 여러 공연에 참여했지만 대학 졸업 후 그는 연주자가 아닌, 또한 심리학자도 아닌 음반 제작자의 삶을 선택했다. 1954년 음반 제작자가 되기 위해 뉴욕으로 이주한 그는 듀크 대학 동문을 통해 베들레헴 레이블의 주인 거스 와일디를 만났다. 당시 베들레헴 레이블은 첫 앨범으로 여성 보컬 크리스 코너의 앨범을 제작하고 있었다. 크리드 테일러는 빅 밴드 편성으로 제작 중이던 앨범의 방향을 트리오 편성으로 바꾸도록 거스 와일디를 설득하고 아예 자신이 제작을 지휘했다. 그렇게 해서 두 장의 10인치 앨범 <Chris Connor Sings Lullabys Of Birdland>와 <Chris Connor Sings Lullabys For Lovers>의 제작을 지휘하면서 그는 본격적인 제작자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베들레헴 레이블의 아티스트 앤 레퍼토리(A&R) 부문의 수장으로 약 1년 반 동안 머무르면서 그는 크리스 코너의 <This Is Chris>(1955)를 비롯해 카이 윈딩과 J.J. 존슨, 허비 맨, 찰스 밍거스 등의 앨범 제작을 이끌었다.

하지만 크리드 테일러의 꿈은 베들레헴 레이블에서 멈추지 않았다. 1956년 그는 한 해전 시작된 대형 음반사인 ABC 파라마운트로 자리를 옮겼다. 그 안에서도 그는 고용된 하우스 제작자로서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제작의 모든 것을 책임 관리하는 제작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마침 그가 제작한 램버트 헨드릭스 & 로스의 앨범 <Sing A Song Of Basie>(1958)년에 성공을 거두면서 ABC 파라마운트는 한번에 많이 팔리지는 않지만 꾸준히 팔릴 수 있는 재즈 쪽 카탈로그를 강화하려 했다. 이를 이용해 크리드 테일러는 산하 레이블의 설립을 제안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레이블이 바로 임펄스(Impulse!)였다. 클라리넷 연주자 토니 스콧의 아내이기도 한 프란 스콧이 만든 로고 디자인, 지금 봐도 산뜻한 흰색, 검은색 오렌지 색으로 구성된 로고 색을 바탕으로 한 게이트 폴드 앨범 디자인 등 모든 것에 정성을 들인 임펄스 레이블은 길 에반스 오케스트라, 올리버 넬슨, 레이 찰스, 카이 윈딩 & J.J. 존슨 등의 앨범을 제작하며 “재즈의 새로운 흐름이 임펄스에(The New Wave Of Jazz On impulse!”라는 슬로건에 걸맞은, 시대를 앞선 신선한 재즈의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색소폰 연주자 존 콜트레인을 레이블의 첫 번째 전속 연주자로 영입한 것은 임펄스 레이블의 이름을 더욱 드높이게 했다. 음악적 자유를 보장 받는 조건으로 임펄스와 계약한 이후 색소폰 연주자는 앨범 <Africa/Brass>를 시작으로 뜨거운 후기의 삶을 시작했다.

앨범 커버 디자인까지 관여할 정도로 제작자로서 모든 것에 세심한 공을 들였지만 ABC 파라마운트의 고용 제작자로서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고 느꼈던 것일까? 임펄스 설립 후 2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6장의 앨범을 제작한 후 그는 1961년 버브 레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1960년 레이블을 설립하고 앨범 제작을 해 온 노먼 그랜츠가 MGM에 레이블을 넘기면서 앨범 제작 책임자 자리가 비었던 것.
버브 레이블에서 그는 웨스 몽고메리, 빌 에반스, 리 코니츠, 지미 스미스, 칼 제이더 등 수 많은 유명 연주자들의 앨범을 제작했다. 그 가운데 <Jazz Samba>(1962)와 <Getz/Gilberto>(1963)로 대표되는 색소폰 연주자 스탄 겟츠의 보사노바 앨범을 제작한 것은 재즈의 역사를 바꾸게 했다. 당시 막 브라질에서 청춘의 음악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던 음악을 미국으로 가져와 재즈와 결합한 앨범을 제작한 것은 모험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모험은 성공해 재즈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으며 보사노바는 지역성을 넘어 세계의 음악으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버브 레이블에서의 성공을 뒤로 한 채 1967년 그는 트럼펫 연주자 허브 앨퍼트가 설립해 운영하고 있던 A&M 레코드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A&M은 주로 팝 록 중심의 앨범을 제작하고 있었는데 이 곳에서 그는 과거 임펄스처럼 재즈를 전문으로 하는 산하 레이블 CTI를 만들었다. 이후 웨스 몽고메리, 폴 데스몬드, 냇 애덜레이, 퀸시 존스, 밀튼 나시멘토 등의 앨범을 제작해 인기를 얻었다.
CTI는 크리드 테일러 주식회사(Creed Taylor Incorporated)의 약자였다. 즉, A&M 산하로 시작했지만 크리드 테일러는 처음부터 CTI를 완전한 독립 레이블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 바람대로 1970년 CTI는 완전한 독립 레이블이 되었다. 이후 프레디 허버드, 휴버트 로우, 스탠리 터렌타인, 빌 에반스, 케니 버렐, 로니 스미스,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 등 유명 연주자들의 앨범을 제작했다.
1970년대 CTI 레이블에서 제작된 앨범들은 재즈의 전통과 당시 새롭게 부각된 퓨전 재즈, 그리고 소울로 대표되는 팝 음악을 영리하게 아우르는 음악을 담고 있었다. 이들 앨범들은 감상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고 그 결과 CTI는 시대를 대표하는 레이블로 인정 받았다.
그러나 앨범 제작과 경영은 달랐다.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CTI는 1977년 모타운 레코드로 유통사를 바꾸는 과정에서 생긴 법적, 재정적인 문제를 견디지 못하고 1978년 파산했다. 이후 1989년 이전 앨범을 재발매하고 새로운 앨범을 제작하는 등 레이블을 다시 살리려 노력했지만 이루지 못했다.

크리드 테일러는 한 시대를 앞선 시야를 지닌 제작자였다. 그와 함께 대중의 취향과 그 변화를 정확히 파악할 줄 알았다. 그래서 베들레헴이 되었건, 임펄스가 되었건, 버브가 되었건, CTI가 되었건 그가 제작한 앨범들은 음악적 진지함, 신선함과 대중적 매력이 공존했다. 이것은 어쩌면 그가 대형 음반사 소속으로 오랜 시간 일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로 인해 재즈가 대중 음악의 한 자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명확한 것은 제작자로서 그가 걸어왔던 길은 그대로 재즈 역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존 콜트레인의 음악, 보사노바 재즈, 70년대 퓨전 재즈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모습이었을 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재즈사의 한 선구자, 한 증인을 떠나 보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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