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심하게 준비된 편안한 브라질 여행 안내
무작정 떠나는 여행도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는 준비를 잘 해야 한다. 특히 해외 여행일 경우에는 사전에 여행지에 대해 살펴보고 일정을 짜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기왕이면 여러 곳을 보겠다는 욕심에 100미터 달리기를 하듯 바삐 움직이는 것보다는 한 장소에 비교적 오래 머무는 일정이면 더 좋겠다. 낯선 곳에 도착해 그곳의 낮과 밤, 주중과 주말을 살펴볼 수 있는 여행이 더 오래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낯선 곳을 익숙한 곳으로 바꾸는 느린 여행이라고 할까? 바삐 여러 곳을 이동하는 여행은 사진으로 이미 보았던 것을 실제로 확인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다. (청춘 시절의 내가 바쁜 여행을 했기에 느린 여행을 선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남성 보컬 러스트(Rust)의 앨범 <The Brazilian Songbook>은 브라질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스트링 섹션이 부드러운 바람처럼 불어오고 기타와 피아노가 물결처럼 흔들리는 사운드를 배경으로 러스트의 노래가 사랑의 속삭임처럼 다가오는 첫 곡 “Caminhos Cruzados”만 들어도 당신은 브라질 해변에 느긋하게 자리를 펴고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행복한 한 때를 생각할 것이다. 이 곡 외에 “As Praias Desertas”나 “Falando de Amor” 같은 곡에서도 당신은 유사한 풍경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처럼 러스트의 노래는 기분 좋은 바다로의 여행을 꿈꾸게 한다. 이미 우리는 러스트의 앨범 이전에 여러 보사노바, 라틴 음악을 담은 앨범을 통해 푸른 하늘과 파란 물결이 넘실대는 해변으로 수 없이 여행을 떠났다. 나 같은 경우 아직 브라질에 가보지도 못했음에도 리우(Rio)에 가본 것 같고 이파네마(Ipanema) 해변을 산책했던 것 같은 착각에 종종 빠지곤 한다.
그런데 러스트 우리를 위해 준비한 여행은 조금 특별한 일정을 지닌 것 같다. 그는 전형적인 브라질 해변만 보게 하지 않는다. 해수욕을 즐기고 사람들을 살펴보고 해변 밖 거리를 걸어보고 브라질 사람들이 즐겨 마신다는 “카이피리냐” 칵테일도 마셔보게 한다. 조금 더 브라질 현지의 분위기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고 할까?
그가 노래한 곡들의 면모부터 그렇다. 그는 이번 앨범에서 보사노바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의 곡들을 중심으로 주앙 도나토, 쉬쿠 부아르키, 제랄도 페레이라 등 브라질 대표 작곡가들의 곡을 노래했다. 하지만 브라질 음악 애호가들이라면 모를까? “Girl From Ipanema”, “Desafinado”처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곡들만 들어온 감상자라면 낯설 법한 곡들이 다수를 이룬다. 그것이 여행자들로 붐비는 거리 바로 옆 골목, 현지 사람들만 잘 아는 한적한 곳을 나만 여행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잔잔한 물결 같은 보사 노바 리듬만을 고집하지 않은 것도 앨범 속 풍경을 다채롭게 만든다. 예를 들면 제랄도 페레이라의 “Sem Compromisso” 같은 곡에서는 남녀가 만나 눈빛을 교환하며 열정적인 춤을 추는 무도회장을,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의 “Modinha” 에서는 사랑 상처에 힘들어하는 한 남자가 서 있는 어두운 골목을 그리게 하며 해변 밖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처럼 이번 앨범은 관광지로서의 브라질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생활지로서의 브라질 여행으로 안내한다. 이런 여행 안내를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미국 보스톤의 버클리 음대에서 공부한 우리의 브라질 여행 가이드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음악을 하고자 하는 마음에 활동 명을 러스트로 정하고 2018년 첫 앨범 <Muze>를 발매했다. 도시적 감각이 반짝거리는 현대적인 질감의 앨범이었다. 앨범 제작을 완료하고 쇼케이스까지 마친 후 앨범에 참여했던 피아노 연주자 조윤성이 다소 의외의 제안을 했다. 라틴 색채를 지닌 앨범을 만들어보자는 것. 알려졌다시피 조윤성은 솔로 연주자로서 뛰어난 활동을 해온 것과 별개로 보컬과 함께하는 것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어 왔다.
피아노 연주자가 막 첫 앨범을 발매한 보컬에게 라틴 스타일의 앨범을 제안한 것은 아무래도 러스트의 부드러운 음색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첫 앨범에서도 그는 음악 스타일은 다를지라도 미성이라 할 수 있는 부드러움으로 이야기를 건네는 듯한 노래를 들려주었다. 이러한 음색과 노래는 보사노바를 중심으로 한 브라질 음악에도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만약 당신이 브라질 음악을 오래 전부터 좋아해왔다면 이번 앨범에서 이반 린스, 카에타노 벨로주, 셀주 폰세카 같은 브라질 출신의 보컬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러스트는 조윤성의 제안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이후 브라질 음악을 열심히 듣고 그 감수성을 흡수하려 노력하는 한편 올바른 발음으로 노래하기 위해 포르투갈 어를 공부했다. 같은 모음이라도 발음에 따라 명과 암이 달라질 수 있을 정도로 언어를 이해한 후에는 여러 공연을 통해 브라질 음악의 질감을 충실히 구현하는 동시에 러스트의 개성이 스며든 음악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중에 약 3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니 어찌 이번 앨범이 우리에게 안내하는 브라질 여행이 특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수록 곡 중 “Modinha”, “Eu Sei Que Vou Te Amar”, “Nova”는 제대로 된 브라질 음악 앨범을 만들고자 했던 러스트의 신중한 노력이 더욱 특별하게 반영되지 않았나 싶다. 이들 곡에서 러스트의 노래는 슬프지만 또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지 않는, 편안하지만 마냥 편안하지 않은, 나른하지만 그렇다고 지루하지 않은 복잡 미묘한 정서, 브라질 음악을 들을 때면 종종 발견되는 신비한 정서를 느끼게 한다.
스탠더드 재즈 곡 “Fly Me To The Moon”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나도 처음에는 이 곡이 브라질 음악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어 의아하다 생각했다. 게다가 라틴 리듬을 사용하지 않았다. 러스트는 이 곡을 조윤성의 피아노 솔로 연주를 배경으로 좀처럼 노래 되지 않는 버스(Verse)까지 넣어 매우 느리게 노래했다. 그래서 평범한 재즈 보컬 곡처럼 보일 법 한데 신기하게도 이 담백한 노래와 연주는 다른 곡들과 잘 어우러지며 브라질 해변의 밤 하늘을 그리게 한다. 러스트의 마음이 곡의 정서에 잘 반영된 것이다.
이번 앨범을 위한 조윤성의 노력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피아노 트리오를 기본으로 나일론 기타와 색소폰, 플루트, 그리고 스트링 앙상블을 적절히 활용한 편곡은 러스트의 노래를 부드럽게 감싸며 노래가 아닌 노래와 연주가 어우러진 음악 자체를 돋보이게 했다.
주앙 도나토의 곡을 노래한 “A Rã”가 대표적이다. 보통 밝고 화사한 분위기로 축제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곤 했던 여느 버전들과 달리 조윤성의 편곡은 긴장 가득한 베이스 솔로로 시작해 완전히 다른 공간, 어떤 사건이 일어날 듯한 긴박한 공간을 제시한다.
나아가 피아노 연주자는 “Natal”, “Nova”, “Viaje Milagrosa” 등의 곡을 직접 쓰기도 했다. 이들 곡에서 그는 보사노바, 삼바 같은 리듬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만 팔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을 그리게 했다.
앨범은 “Viaje Milagrosa”으로 끝난다. 가사 없이 러스트의 스캣으로 이루어진 이 곡의 제목은 우리 말로 “놀라운 여행”을 의미한다. 러스트가 이 앨범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려 했던 의도를 잘 반영한 제목이라 하겠다.
실제 나는 앨범을 다 듣고 난 후 매우 색다르고 신기한 여행을 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심지어 비행기 시간표를 살펴보기도 했다. 당신의 반응도 나와 그리 다리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가까운 국내 바다라도 가보려 하지 않을까? 이 앨범을 들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