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분방한 히로미 스트링 쿼텟을 만나다
클래식과 재즈는 악보 중심의 음악과 자유로운 즉흥연주 중심의 음악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는 대척점에 놓인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 양극에 있는 것 같은 음악은 어울림을 거듭해 다른 어느 음악보다 가까운 사이가 된 것 같다. 특히 많은 재즈 연주자들이 재즈만큼이나 클래식을 가까이 하며 성장한 결과 클래식 같은 재즈를 선보이고 있다.
피아노 연주자 히로미의 이번 앨범도 그 중 하나이다. 이 앨범에서 그녀는 두 대의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로 이루어진 스트링 쿼텟과 협연했다. 피아노 퀸텟 편성으로 연주한 것이다. 그동안 누구보다도 자유분방한 스타일로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은 현란한 연주를 펼쳐온 그녀로서는 굉장한 모험이라 하겠다. 정통 클래식 연주자들의 악보 중심 연주와 호흡을 맞춰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제약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늘 새로운 결과를 낳는다. 히로미에게 스트링 쿼텟과의 협연은 분명 또 다른 환경 속에 자신을 던지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낯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내 그녀는 그 속에서도 자신의 개성을 드러냈다.
그것은 피아노 퀸텟의 움직임이 보통의 실내악을 넘어 피아노 협주곡 같다는 것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자유로운 피아노 연주자가 이끄는 퀸텟은 피아노,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의 섬세한 어우러짐과 대화로 이루어진 실내악보다는 우주적인 피아노와 스트링 쿼텟 간의 어울림과 소통이 강조되어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협연처럼 다가온다. 그렇기에 피아노는 충분히 자유로울 수 있었고 스트링 쿼텟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피아노의 움직임에도 위태로움 없는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었다. 실제 앨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Silver Lining Suite”의 전 4악장을 들어보면 음악의 울림만큼은 편성을 뛰어넘는 거대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또한 히로미는 흔히 말하는 재즈와 클래식의 만남 같은 주제를 상정하고 곡을 쓰고 연주한 것 같지 않다. 그보다는 삶이 자연스레 새로운 스타일의 곡을 쓰고 연주하게 했다. 그녀가 이번 앨범을 만들게 된 것은 코로나 펜데믹의 영향 때문이었다. 2019년 피아노 솔로 앨범 “Spectrum”을 발매하고 세계 곳곳을 돌며 공연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일본에 머물러야 했다. 그 상황에서 “희망 조곡(Silver Lining Suite)”에 대한 영감이 떠올랐다. 그 결과 뉴 재팬 필하모닉의 악장(樂長)이기도 한 바이올린 연주자 타츠오 니시에의 도움으로 피아노 5중주 곡을 완성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색다른 곡은 움직이지 못하게 된 그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녀는 답답함을 드러내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고립-낯섦-표류”를 거쳐 “꿋꿋함”으로 끝나는 4악장의 구성처럼 새로운 상황에 낯설어 하고 불안해 하다가 이내 잘 적응하고 그 속에서 다시 자유를 찾은 자신을 보여줌으로서 희망을 표현했다.
“희망 조곡” 외에 앨범에는 그녀의 자작곡 5곡이 추가로 담겼다. 이들 곡 또한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히로미의 에너지 이에 보조를 맞추는 스트링 쿼텟의 역동적 어울림을 맛보게 한다. 그러면서 재즈 연주자로서의 그녀와 클래식적 소양을 지닌 그녀의 모습을 보다 명확히 느끼게 한다. 2012년 앨범 <Move>에서 앤서니 잭슨(베이스), 사이먼 필립스(드럼)와 트리오로 연주했던 곡을 새로이 편곡해 연주한 “11:49PM”이 그렇다. 스트링 쿼텟과 어울렸다가 홀로 독립하는 연주의 흐름이 탈장르적인 그녀의 모습을 엿보게 한다.
한편 “Uncertainty”는 앨범에서 유일한 피아노 솔로 곡이라는 점에서 특별하기도 하지만 스트링 쿼텟과의 협연보다 더 클래식적인 느낌 속에서 “희망 조곡”에 담긴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한 우울함과 그에 대한 극복을 응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게 다가온다. 또한 그 과정에서 필립 글래스의 미니멀리즘 클래식과 키스 자렛의 자유로운 시정이 어우러지면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싶은 히로미의 연주 또한 매우 매력적이다.
환경에 적응한다는 것은 수동적으로 환경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자유로이 움직이며 나아가 이를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히로미의 이번 앨범이 바로 그 예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