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리 해리스(Barry Harris 1929.12.15 ~ 2021.12.08)

재즈의 전통을 지켰던 수호자 하늘로 날아가다

2021년 12월 8일 피아노 연주자 배리 해리스가 세상을 떠났다. 만 92세 생일을 1주일 앞두고 였다. 사인은 코로나 19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한 합병증이었다. 연로했고 1993년 연주 활동을 위협할 수준의 뇌졸증을 앓았던 적이 있던 터라 건강상 문제도 있었기에 그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은 삶의 마지막을 늘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도 유행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한 사망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사망하기 약 한달 전에 백신 접종을 했었기에 12월 8일의 사망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나이와 상관 없이 죽음은 늘 뜻하지 않은 상황에 찾아온다.

1929년 12월 15일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난 그는 재즈의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보다 한 세대 앞선 선배들이 만들어낸 비밥 재즈를 신봉했고 이것이 하드 밥으로 나아가는데 힘을 보탰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를 고수했다. 그가 평생 비밥을 연주한 것은 어린 시절 한 스케이트장에서 있었던 찰리 파커와 스트링 섹션의 공연이 큰 역할을 했다. 이 공연은 그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최고의 감동을 주었다. 그것이 재즈 피아노를 독학으로 공부하게 만들었다.

그는 비밥 혁명을 이끈 여러 연주자들 중 버드 파웰과 델로니어스 몽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재즈 피아노 공부를 그는 버드 파웰의 연주를 듣고 따라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것이 그의 연주에 역동성, 명확성이 스며들게 했다. 델로니어스 몽크에게서는 여백의 활동과 뒤뚱거리는 듯 개성 강한 움직임의 영향을 받았다. 이 선배 피아노 연주자와는 함께 살기도 했다. 1950년대까지 고향 디트로이트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그는 1960년대가 시작되자 뉴욕으로 무대를 옮겼다. 새로운 도시에서 그는 당시 재즈의 후원자로 유명한 파노니카 드 쾨닉스워터 남작 부인의 집에 살게 되었다. 이후 말년의 델로니어스 몽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머물었다.

선배 연주자들의 영향을 수용한 결과 그의 연주는 경쾌한 리듬을 유지했다. 또한 유려한 흐름 속에서 때로는 말 수를 줄일 줄 도 알았다. 여기에 템포와 상관 없이 유지되는 산뜻하고 상냥한 정서는 비밥과 하드 밥 시대의 여러 피아노 연주자들 사이에서 그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덱스터 고든, 리 모건, 도날드 버드, 소니 스팃, 캐논볼 아들레이, 찰스 맥퍼슨을 비롯한 많은 유명 연주자들이 그를 찾은 것이 이를 말한다. 앨범마다 그는 리더 연주자의 음악적 성향을 파악하고 그에 걸맞은 연주를 펼치곤 했다. 예를 들어 덱스터 고든의 앨범 <Getting’ Around>(1965)에서 보여준 느긋한 여유와 리 모건의 앨범 <The Sidewinder>(1963)에서 보여준 산뜻 명쾌한 움직임은 리더 연주자의 스타일에 잘 부합되는 것이었다.

많은 연주자들이 그를 찾았고 그 또한 사이드맨 활동을 즐겼기 때문인지 1950년대부터 70년 이상 활동한 것에 비해 리더 앨범은 약 25장으로 그리 많지 않다. 트리오를 중심으로 간간히 콤보 편성으로 녹음한 그의 앨범들은 한결 같았다. 비밥의 전통을 고수한, 치열하고 진지하면서도 대중적인 매력을 겸비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1958년에 발매된 첫 앨범 <Breakin; It Up>과 마지막 앨범이 된 2009년도 앨범 <Live In Rennes>>이나 연주 스타일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 그렇다고 진부한 연주로 일관했다는 것은 아니다. 어법은 같았지만 이야기는 달랐다. 그에게는 비밥이 전부였고 재즈의 흐름이 그의 청춘 시대 이후 다양하게 갈라질수록 보존해야 할 가치 있는 것이었다. 그처럼 재즈의 폭을 넓히기보다는 두께를 두껍게 하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재즈의 안정적인 오늘이 있었다.

그는 근면하고 열정적인 재즈 교육자였다. 하지만 학교에 소속되어 엘리트를 양성하는 선생님, 교수님이 된 적은 없었다. 활발하게 활동하는 현역 연주자로서 워크숍을 꾸준하고 활발하게 운영했다. 그의 워크숍은 시간 날 때 하는 산발적 행사가 아니었다. 주 1회 강의를 원칙으로 1974년에 시작해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47년간 유지했을 정도로 꾸준했다. 그의 워크숍은 10대의 학생이 아닌 20대 이상의 성인 연주자를 대상으로 했다. 수강료 또한 저렴했고 1회부터 장기까지 상황과 형편에 따라 참여할 수 있도록 열린 형태로 운영했다.

1982년에는 파노니카 드 쾨닉스워터 남작 부인의 후원으로 맨하탄에 재즈 문화 극장이라는 다목적 공간을 만들어 약 5년간 이 공간을 거점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여러 유명 연주자들과의 공연을 병행하기도 했다. 재정 문제로 극장의 문을 닫은 후에도 그는 여러 공간을 빌려가며 자신의 교육 활동을 이어갔다. 코로나 펜데믹 시대에는 실시간 화상 강의로 진행했다. 그에게 재즈 교육은 연주만큼이나 중요했다. 학생들이 자신의 가르침으로 향상된 연주를 펼치는 것을 매우 행복해했다. 그를 재즈의 전통을 지킨 인물이라 평하는 것은 그의 연주 스타일 외에 지속적인 교육 활동도 큰 영향을 주었다. 1989년 국립 예술 재단의 재즈 마스터로 임명 된 것을 비롯해 2000년 미국 재즈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등 여러 명예를 얻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의 마지막 무대는 세상을 떠나기 약 한달 전인 2021년 11월 12일 그처럼 국립 예술 재단의 재즈 마스터로 임명된 동료 연주자들과의 공연이었다. 여기서 그는 1979년에 처음 선보였던, 그로서는 드문 보컬 곡인 “The Bird of Red and Gold”를 오랜만에 노래했다. 세상에 사랑과 평화가 가득하기를 바라는 내용의 노래는 어지러운 지금의 세상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다만 이 노래를 마지막으로 그 스스로가 붉고 금빛 나는 새가 되어 날아간 것을 제외하고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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