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6일 베이스 연주자 조지 므라즈가 세상을 떠났다. 만 77세 생일 축하를 받은 지 1주일밖에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사망 이유는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지난 2016년 췌장암 수술을 받고 그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그의 아내가 크라우드 펀드 페이지를 개설했던 것을 보면 그 이후에도 건강이 계속 좋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944년 9월 9일 체코슬로바키아-당시에는 나치 독일의 보호령이었고 1990년대에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는-의 피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7세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다. 하지만 12세 무렵 철의 장막을 뚫고 사회주의 공화국에도 들렸던 “미국의 소리” 방송을 통해 재즈에 빠지게 되면서 베이스로 전환했다.
상황이 그랬던 만큼 그는 1961년 프라하 음악원에 입학해 클래식을 공부하면서 레이 브라운, 폴 체임버스, 론 카터, 스콧 라파로 등의 연주를 들으며 독학으로 재즈 연주 기법을 습득했다. 이런 공부 방식은 그에게 타인의 연주에 귀 기울이는 자세를 갖게 만들었다. 그가 리더보다 사이드맨으로서의 활동에 주력했고 연주자들의 연주자라 불릴 정도로 동료 연주자들에게 인정을 받았던 것도 연주력만큼이나 이 듣는 자세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는 1968년 버클리 음대에 장학생으로 선발된 것을 계기로 미국에 올 수 있었다. 이 때에도 그는 학업만큼 클럽 공연을 열심히 했다. 그 결과 1969년 트럼펫 연주자 디지 길레스피로부터 뉴욕 공연에 함께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이 소중한 기회는 다시 같은 무대에 섰던 피아노 연주자 오스카 피터슨과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오스카 피터슨과 2년간 함께 하면서 그는 피아노 연주자의 경쾌한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면서도 매우 차분하고 조용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고 소극적이지는 않았다. 맛깔스러운 솔로를 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는 리더의 존재를 돋보이게 하는 연주였다.
이러한 연주는 이후 그의 장점이 되어 여러 연주자들이 그를 찾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오스카 피터슨 외에 토미 플라나간, 롤랜드 한나, 스티브 쿤, 테트 몽텔리우 등의 피아노 연주자와 함께 한 앨범들을 들어봐도 알 수 있다.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리더를 지원하는 그의 연주를 만나게 될 것이다.
한편 조지 므라즈 자신은 보이지 않으려 하는 것 같지만 정작 그의 연주는 의외로 잘 들렸다. 이것은 그의 베이스 톤 때문이었다. 그의 베이스 톤은 생각보다 가볍고 날렵했다. 그리고 탄성이 높았다. 가끔은 일렉트릭 베이스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탄력적인 소리로 밴드 사운드에 역동성을 더했다.
피아노 연주자들 외에 그는 태드 존스와 멜 루이스 의 빅 밴드를 비롯해 스탄 겟츠, 조 로바노, 아트 페퍼, 주트 심스, 페퍼 아담스, 조 로바노, 짐 홀, 래리 코리엘, 존 애버크롬비, 밥 브룩 마이어, 지미 네퍼, 카멘 맥래, 디디 브리지워터 등 수많은 유명 연주자들의 사이드 맨으로 활동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와 함께 한 연주자들이 비교적 전통적인 스타일부터 매우 진보적인 스타일까지 아우르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그만큼 그가 어떠한 상황에서건 그에 어울리는 연주를 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리더 앨범도 남겼다. 하지만 사이드맨 활동에 비해 그렇게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는 12장의 리더 앨범-공동 앨범도 있다-을 발표했다. 편성과 음악적 내용 모두 다채로운 앨범들이다. 음악적 내용도 대부분 훌륭했다. 이들 앨범이 덜 주목 받았던 것은 그 자신이 사이드맨 활동에 주력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리더 앨범에서도 함께 하는 연주자들에 더 많은 자리를 양보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에게 베이스는 밴드의 뒤, 사운드의 기저에 위치해야 하는 악기였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