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니 스미스 (Dr. Lonnie Smith, 1942.07.03 ~ 2021.09.28)

지난 9월 28일, 오르간 연주자 로니 스미스가 세상을 떠났다. 만 79세 우리 계산으로는 팔순이었다. 사인은 폐섬유증으로 인한 합병증이라 한다. 이 오르간 연주자의 사망은 12일 전에 발생한 베이스 연주자의 사망보다 더 충격이 아니었나 싶다. 올 해 초 새로운 앨범을 발매하는 등 현재 활동 중인 연주자로서의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특히 2016년 블루 노트 레이블로 45년만에 돌아온 이후 다시금 너른 관심을 받고 있던 중이지 않았던가?

오르간은 1960년대, 소울 재즈 시대의 악기였다. 이 때 오르간은 피아노, 색소폰에 버금 가는 대세 악기였다. 그러나 소울 재즈의 인기가 시들면서 오르간의 인기 또한 사그라졌다. 이후 오르간은 지난 시대를 추억하게 만드는 악기의 느낌이 강했다. 키보드, 신디사이저 등 보다 현대적인 대체 악기가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니 스미스는 오르간을 연주하며 이 악기가 현재에도, 지금의 세대에게도 통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곡을 새롭게 변주(Doctor Up)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박사”라는 별명이 붙은 “닥터” 로니 스미스는 1942년 7월 3일 뉴욕 주의 버팔로에서 태어났다. 보컬 활동을 하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의 음악 인생을 노래로 시작했다.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와 보컬 그룹 틴 킹에서 노래하기도 했다. 이런 그가 오르간을 연주하게 된 것은 지역의 악기 판매점 주인의 덕이었다. 평소 악기를 구경하고 가던 소년 로니 스미스에게 하몬드 오르간을 보여주고 연주하게 한 것. 당시 지미 스미스의 소울 재즈가 인기를 얻고 있었기에 오르간을 권했던 것 같다.

그가 본격적으로 전문 연주자의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은 조지 므라즈처럼 인연을 통해서였다. 지역에 공연을 위해 방문했던 오르간 연주자 잭 먹더프에게 오르간을 빌려준 대가로 무대에서 잠깐 연주할 기회를 얻었는데 이것을 기타 연주자 조지 벤슨이 보고 이제 막 시작할 리더 활동에 함께할 연주자로 선택한 것이다.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조지 벤슨은 재즈를 이끌 신예 기타 연주자로 이내 인정 받았다. 이와 함께 로니 스미스 또한 주목을 받았다. 그 결과 1967년 이번에는 조지 벤슨을 사이드 맨으로 두고 첫 리더 앨범 을 발표할 수 있었다. 넘실대는 그루브로 가득한 흥겨운 펑키 재즈 앨범이었다.

이후 그는 소울 재즈의 또 다른 스타였던 색소폰 연주자 루 도널드손의 밴드에서 연주하기도 했지만 리더 활동에 집중했다. 그 결과 1969년 <다운 비트>지의 올해의 오르간 연주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1970년대에도 그의 펑키한 감각은 더욱 빛을 발했다. 그는 울렁이는 오르간으로 감상자를 황홀한 몸놀림으로 이끌었다. 또한 대중적인 면을 반영하기 위해 여러 연주자를 참여시켜 사운드의 화려함, 입체감을 더하는 한편 막 도래한 디스코를 수용해 음악적 변모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런 그조차도 오르간의 인기가 갈수록 줄어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1980년대에 접어들어 그는 거의 활동하지 않았다. 그냥 시대의 뒤안길로 빨려 들어간 것 같았다.

하지만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는 다시 모습을 보였다. 지난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전통적 앨범을 제작하는 일본의 비너스 레이블에서 리더 앨범을 녹음한 것. 이 외에 오랜만에 루 도날드손과 앨범을 녹음하기도 했다. 이것을 보면 이제 그가 청춘 시절의 영광을 되새김질하는 중견 연주자의 삶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할 만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2000년대에 접어들어 그는 오르간이 가장 빛났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바로 지금 이 시대와 호흡하는 재즈를 선보였다. 소울 재즈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변화 속에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블루 노트 레이블로 다시 돌아온 이후에는 다시 젊음을 되찾은 것만 같았다. 아무도 그것이 그의 마지막 불꽃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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