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었던 레이블
재즈가 그대로 팝 음악을 의미했던 스윙 시대를 제외하고 재즈는 언제나 독립 레이블 중심의 음악이었다. 블루 노트, 프레스티지, 리버사이드, 버브 등 재즈의 역사를 이끌고 기록했던 레이블들은 모두 독립 레이블로 시작했다.
독립 레이블은 제작비 수급에 어려움을 겪곤 했지만 연주자나 제작자가 자신의 음악적 이상을 구현할 수 있도록 했다. 상업적인 부분은 그 다음의 고려 대상이었다.
임펄스 레이블은 달랐다. 1961년에 설립된 이 레이블은 ABC (파라마운트) 레코드의 산하 레이블로 그 역사를 시작했다. 당시 ABC 레코드는 재즈 쪽 카탈로그를 강화하기로 했다. 재즈 앨범은 한번에 많이 팔리지는 않지만 클래식 앨범처럼 꾸준히 팔린다는 판단에서였다. 마침 당시 고용되어 있던 제작자 크리드 테일러가 제작한 보컬 트리오 램버트, 헨드릭, 로스의 앨범 <Sing A Song Of Basie>가 큰 인기를 얻었다. 이에 ABC 파라마운트 레코드는 크리드 테일러를 새로운 산하 레이블의 제작을 맡겼다. .
초기 시절과 크리드 테일러
크리드 테일러는 레이블의 이름을 펄스(Pulse)로 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펄스 레이블이 있었다. 그래서 “Im”을 붙여 임펄스로 정했다. 이후 클라리넷 연주자 토니 스콧의 아내이기도 한 프란 스콧이 “Impulse”의 첫 글자 “I”를 소문자로 사용하고 이를 뒤집어 만든 느낌표를 끝에 붙여 레이블 로고를 완성했다. 또한 흰색과 검은색, 그리고 오렌지 색을 사용해 지금 봐도 산뜻하고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
크리드 테일러는 임펄스 레이블의 슬로건을 “재즈의 새로운 흐름이 임펄스에(The New Wave Of Jazz On impulse!”로 정했다. 이 슬로건에 걸맞게 레이블은 1960년대 재즈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길 에반스 오케스트라의 <Out Of The Cool>, 올리버 넬슨의 <The Blues And The Abstract Truth>이 그 시작이었다. 레이블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앨범으로 제작된 이들 앨범은 하드 밥 시대를 뒤로하고 한층 진일보한 음악으로 레이블을 새로이 시작한 10년에 어울리는 것으로 인식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크리드 테일러가 임펄스 레이블의 초기 시절에 가장 잘 한 일은 존 콜트레인을 첫 번째 전속 연주자로 영입한 것이었다. 당시 아틀란틱 레이블에서 녹음한 앨범 <My Favorite Things>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색소폰 연주자는 엔지니어 루디 반 겔더가 참여한 임펄스 레이블의 우수한 제작 환경에 이끌려 신생 레이블과 계약했다. 계약 조건도 좋았다. 레이블은 색소폰 연주자에게 1년에 두 장의 앨범을 녹음하는 것을 조건으로 첫 해에는 1만 달러를, 이듬해부터는 2만 달러를 선지급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음악적 자유를 보장한 것이 좋았다. 존 콜트레인은 빅 밴드 앨범 <Africa/Brass>을 시작으로 가장 빛나는 시절로 기록될 임펄스 레이블에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본격적 성공의 시기 그리고 밥 틸
보통 유명한 독립 레이블은 제작자를 중심으로 성장하고 변화한다. 제작자의 이상이 레이블의 이상이 되기에 제작자가 바뀌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임펄스 레이블은 설립 후 2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61년 제작자의 변화를 겪었다. 1961년 말 크리드 테일러가 버브 레이블로 자리를 옮긴 것. 존 콜트레인을 영입하고 자신이 제작한 앨범에 자신의 서명을 넣을 정도로 레이블의 성공을 위해 노력했던 그였기에 그의 떠남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하지만 ABC 레코드의 고용 제작자였으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가 떠난 빈자리를 메우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등장한 인물이 밥 틸이었다. 데카 레이블에서 제작을 담당했던 그는 존 콜트레인의 1961년 빌리지 뱅가드 공연을 담은 앨범 <Coltrane “Live” At The Village Vanguard>을 시작으로 임펄스 레이블의 두 번째 제작자로서의 역할을 시작했다.
그는 재즈 전문 제작자가 아니었다. 데카 레이블 시절 팝을 중심으로 다양한 스타일의 앨범을 제작했다. 그러나 그는 재즈에 새로운 흐름을 가져오겠다는 임펄스 레이블의 이상을 잘 파악했다. 존 콜트레인 쿼텟의 멤버인 맥코이 타이너, 엘빈 존스, 지미 개리슨의 리더 앨범을 비롯해 프레디 허바드, 아치 쉐프, 찰스 밍거스, 앨리스 콜트레인, 알버트 아일러, 파로아 샌더스, 찰리 헤이든 리버레이션 뮤직 오케스트라 등 참신하고 진보적인 성향의 연주자들의 앨범이 그 결과였다.
아방가르드 재즈는 1960년대를 지배하던 흐름이었다. 그래도 밥 틸은 콜맨 호킨스, 커티스 풀러, 듀크 엘링턴, 카운트 베이시, 소니 스팃, 클락 테리 등 재즈의 전통을 지탱하던 연주자들의 앨범을 제작해 레이블의 음악적 성향을 한 쪽에 치우치지 않게 했다.
밥 틸에게도 존 콜트레인은 레이블의 핵심이었다. 그는 색소폰 연주자에게 제작자를 넘어 속 깊은 친구가 되었다. 누구보다 존 콜트레인이 하고픈 음악을 이해하고 그를 지원했다. 존 콜트레인은 물론 레이블 최고의 앨범으로 남아 있는 1965년도 앨범 <Love Supreme>이 대표적이다. 한편 제작자는 색소폰 연주자에게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자극하기도 했다. 존 콜트레인 고유의 낭만을 담은 앨범 <Ballads>, 남성 보컬 자니 하트만과의 공동 앨범, 듀크 엘링턴과의 협업 앨범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존 콜트레인이 임펄스 레이블에서 녹음한 앨범들은 모두 평단과 대중 모두의 호응을 얻었다. 1967년 사후에 발매된 앨범들도 마찬가지였다. 존 콜트레인을 빼고 임펄스 레이블을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산하 레이블의 명과 암
임펄스 레이블이 빠른 시기에 인기 재즈 레이블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크리드 테일러와 밥 틸의 탁월한 연주자 선택, 그에 부응하는 연주자들의 훌륭한 음악, 선명한 음질과 게이트폴드를 기본으로 한 매력적인 디자인 때문이었다. 여기에 레이블의 모회사인 ABC 레코드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이 모회사는 앨범을 판매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Love Supreme>이 재즈 앨범으로는 드물게 발매 후 몇 달 만에 10만장이나 팔린 것은 음악만큼이나 모 회사의 유통, 홍보 능력 때문이었다.
그렇다 보니 제작자가 제작의 자유를 침해 받는 일이 생기곤 했다. 특히 1965년 ABC 레코드 수장으로 부임한 래리 뉴튼은 종종 밥 틸을 간섭했다. 예를 들면 1966년 색소폰 연주자 파로아 샌더스와 계약하고 첫 앨범 <Tauhid>를 녹음했을 때 재즈에 무지했던 래리 뉴튼은 판매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실제 결과를 보고는 반색했다.)
갈수록 밥 틸과 모회사의 판매부와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이를 견디지 못한 밥 틸은 결국 1969년 자신의 진정한 독립 레이블 “플라잉 더치맨 레코드(Flying Dutchman Records)를 세우며 임펄스 레이블을 떠났다.
1970년대, 존 콜트레인 유산의 지속
밥 틸이 떠난 이후 임펄스 레이블은 에드 미첼이라는 새로운 제작자를 맞이했다. 에드 미첼의 제작 방향은 어찌 보면 보수적이었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1970년도 앨범 <Bitches Brew>와 함께 퓨전 재즈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에도 아방가르드, 프리 재즈 앨범을 지속적으로 제작한 것이다. 파로아 샌더스, 앨리스 콜트레인, 아치 쉐프 등 존 콜트레인의 유산을 이어받은 연주자들과 선 라, 오넷 콜맨, 알버트 아일러 등의 연주자들의 앨범이 카탈로그의 대부분을 차지 했다. 여기에 키스 자렛, 아마드 자말, 가토 바비에리 등의 새로운 연주자들의 앨범이 추가되었다.
이 무렵 발매된 진보적 성향의 앨범들은 모두 음악적으로 훌륭했다. 하지만 퓨전 재즈의 시대에 발매되었기 때문일까? 임펄스 레이블의 앨범 판매는 이전 10년에 비해 줄어들었다. 이를 존 콜트레인이 만회했다. 레이블은 1967년 세상을 떠난 이 색소폰 연주자의 미공개 음원을 계속 발매하고 기존 음원을 새롭게 정리한 앨범을 꾸준히 발매했다. 이들 앨범이 레이블의 경제적 안정에 큰 힘이 되었다.
인수합병 이후
그럼에도 임펄스 레이블의 상황은 악화되었고 대신 모회사의 간섭은 늘었다. 이에 1975년 에드 미첼이 레이블을 떠나고 버브 레이블에서 일했던 에드먼드 에드워즈가 새로운 제작자가 되었다. 그는 갈수록 부족해지는 예산과 간섭 속에서 레이블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제네시스나 블루스 연주자 B.B. 킹의 앨범을 발매하는 등 레이블의 정체성에 변화를 줄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1979년 ABC. 레코드가 MCA 레코드-후에 유니버설 레코드로 성장할-에 합병되면서 에드먼드 에드워즈는 더 이상 새로운 앨범을 제작할 수 없었다.
1987년부터 임펄스 레이블은 다시 새로운 앨범 제작을 시작했다. 마이클 브레커, 다이아나 크롤, 호레이스 실버, 잭 드조넷, 호레이스 실버, 맥코이 타이너 등의 앨범이 제작되었는데 여러 레이블을 거느린 거대 음반사의 하나가 되었기에 앨범의 완성도와 상관 없이 레이블의 개성을 이야기하기는 어려웠다. 최근 발매된 선즈 오브 케멧, 샤바카 허칭스, 브랜디 영거 등 시대를 앞선 연주자들의 앨범이 영광의 과거를 다시 떠올리게 하지만 말이다.
존 콜트레인의 집
그렇다고 그 역사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사라질 것 같지도 않다. 특히 존 콜트레인 때문이다. 음악 칼럼니스트 애슐리 칸은 임펄스 레이블의 역사를 정리한 책을 쓰면서 <트레인이 지은 집>으로 제목을 정했다. 그만큼 존 콜트레인이 레이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막강하다는 뜻이었다. 임펄스 레이블의 설립 60주년을 맞아 올 해 발매된 박스 세트 앨범 <Impulse Records: Music, Message and the Moment Box Set>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지금도 임펄스 레이블은 존 콜트레인의 미공개 음원을 찾고 있다. 2018년에 발매된 <Both Directions At Once: The Lost Album>, 2019년에 발매된 <Blue World>가 그 최근 결과물이다.
여기에 보물찾기의 새로운 결과물이 나타났다. 조 브라질이라는 한 색소폰 연주자이자 교육자가 녹음한 존 콜트레인의 1965년 시애틀 공연을 담은 앨범 <A Love Supreme: Live In Seattle>이 발매를 앞두고 있는 것. 존 콜트레인은 “A Love Supreme”을 라이브로 거의 연주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1965년 7월 프랑스 주앙 르 팽 페스티벌에서의 연주뿐이다.
그렇기에 이 시애틀 공연을 담은 이번 앨범은 매우 특별하게 다가온다. 게다가 존 콜트레인 쿼텟 외에 색소폰 연주자 파로아 샌더스와 카를로스 워드, 그리고 베이스 연주자 도널드 라파엘 가렛이 추가된 셉텟 편성의 연주이기에 더욱 흥미롭다.
이 앨범을 들으며 존 콜트레인의 빛나는 시절은 물론 임펄스 레이블의 황금기를 회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