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의 답답함을 날리는 시원한 연주
재즈 연주자는 새로움을 추구한다. 매번 새롭게 연주하려 노력한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그에게 최고의 경쟁자는 이전의 자신일 지 모른다. 그런데 이런 자세에서 조심해야 할 것은 새로움의 추구를 진화와 연결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매번 발전하고 진화한다면 좋겠지만 어디 그럴 수 있는가? 잘못하면 음악 활동의 즐거움이 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진화보다는 변화를 추구하라 하고 싶다. 실제 오랜 시간 활동하며 거장의 반열에 오른 연주자들의 삶은 진화보다는 변화에 가까웠다. 베이스 연주자 데이브 홀랜드의 음악적 삶도 그랬다. 기타 연주자 케빈 유뱅크스, 드럼 연주자 오베드 칼배어와 트리오를 이룬 이번 앨범에서 그는 지난 시절에 선보였던 스타일을 새롭게 변용한 연주를 들려준다. 하지만 그것이 전혀 고루하지 않다. 또 다른 영역(Another Land)를 꿈꾸게 한다.
일단 기타-베이스-드럼으로 구성된 트리오 편성이 새롭다. 기타 트리오 앨범으로는 존 애버크롬비(기타), 잭 드조넷(드럼)과 함께 했던 그룹 게이트웨이 시절을 제외하고 이번이 처음이며 단순 트리오 앨범으로는 스티브 콜맨(색소폰), 잭 드조넷(드럼)과 함께 했던 1988년도 앨범 <Triplicate>이후 처음이다. (지난 해 발매된 피아노 트리오 앨범 <Without Deception>은 피아노 연주자 케니 배런이 공동 리더였다.)
어쿠스틱 베이스 외에 일렉트릭 베이스를 연주한 것도 새롭다. 게이트웨이 시절에도 어쿠스틱 베이스를 연주했다. 1968년 론 카터의 후임으로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에 합류하며 일렉트릭 베이스를 연주한 이후 앨범 상으로는 처음이 아닐까 싶다.
이 편성과 악기의 새로움으로 트리오는 강렬한 퓨전 재즈를 선보인다. 아니 그보다는 가끔씩 유명 연주자들이 모여 뜨거운 열기 속에 자신들의 기교를 유감 없이 드러내는 프로젝트 슈퍼 트리오 에 더 가깝다. 베이스 연주자와 기타 연주자가 각각 4곡을, 드럼 연주자가 한 곡을 준비한 것도 그렇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 트리오가 오래 전부터 공연을 중심으로 활동해 왔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슈퍼 트리오적인 특성은 앨범의 시작을 알리는 “Grave Walker”에서부터 감지된다. 펑키한 리듬, 일렉트릭 베이스와 일렉트릭 기타의 날렵한 움직임이 땀방울 뚝뚝 떨어지는 열기와 그것이 주는 역설적인 시원함을 선사한다. 단순한 리프를 중심으로 쉴 새 없이 상승하며 록적인 쾌감을 선사하는 “Mashup”도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 이 시원함은 아마도 데이브 홀랜드의 음악을 꾸준히 들었던 감상자들에게는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언제 데이브 홀랜드가 이렇게 단순 명료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적이 있던가?
베이스 연주자는 솔로, 쿼텟, 퀸텟을 거쳐 빅 밴드를 정점으로 다시 퀸텟, 쿼텟으로 편성을 축소하는 흐름을 보여왔다. 이번 트리오 앨범도 그 축소 과정의 일환일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나는 이 앨범이 코로나 19 펜데믹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연주 여행도 못하고 집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이 그에게 일체의 복잡함을 잊고 연주 자체에 집중하는 앨범을 녹음하게 하지 않았을까?
“20 20”이 그 실례(實例)가 아닐까 싶다. 곡 제목부터 코로나 19 펜데믹 속에 허우적거렸던 지난 해를 연상시키는 이 곡은 어쿠스틱 베이스의 음울한 아르코 연주로 시작한다. 그리고 블루지한 테마를 기타와 베이스의 단력 넘치는 솔로로 이어가더니 지미 헨드릭스를 연상시키는 건친 질감으로 폭 발해 고단했던 지난 해를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 어쿠스틱 베이스의 부드러운 안내를 따라 낯선 공간으로의 여행에 빠지게 하는 타이틀 곡, 느긋한 솔로의 이어짐으로 숙제처럼 주어진 시간을 표현한 “Passing Time”, 고요 속을 천천히 탐미하는 “Quiet Fire” 등의 미디엄 템포 이하의 곡들도 앨범이 지난 해의 특별한 상황 속에 만들어졌음을 생각하게 한다.
음악 내용을 두고 본다면 데이브 홀랜드의 이번 앨범은 들어보지 못한 새것을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앨범을 구태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전혀 없을 것이다. 새롭다 할 것이다. 그것은 데이브 홀랜드를 중심으로 한 세 사람의 연주와 호흡이 화려하고 정교하며 안정적이기 때문이지만 그와 함께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정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올 여름을 위한 앨범으로 감히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