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드 재즈의 이상적 모습을 구현한 그룹
재즈는 순간에 충실한 연주자와 그들의 창의성이 중심이 된 음악이다. 그래서 대중적인 면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래도 재즈는 늘 시대와 호흡하려 했다. 재즈 자체가 대중 음악이었던 스윙 재즈 시대 이후 비밥, 쿨, 하드 밥, 프리 재즈 등의 사조가 이어지며 재즈의 예술성이 강조되는 중에도 재즈는 대중 음악으로서의 위치를 잊지 않았다.
1970년대 퓨전 재즈가 등장한 것도 그랬다. 당시 큰 인기를 얻고 있던 록 음악을 수용해 이전 세대와는 질감부터 다른 이 재즈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던 대중, 특히 젊은 층의 관심을 회복했다. 그렇다고 대중적인 면만을 강조하지도 않았다. 그런 중에도 연주의 즐거움, 새로움을 향한 재즈 본연의 의지는 그대로였다.
1980년대에 접어 들어 퓨전 재즈의 음악적 특성 상당 부분이 스무드 재즈로 이행된 것도 재즈의 대중적 관심의 결과였다. 대중 음악의 중심이 록에서 서서히 R&B로 이행했고 이 변화를 퓨전 재즈가 수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중적인 면을 너무나 의식한 탓일까? 스무드 재즈는 갈수록 도시적 질감의 배경 음악이 되어 갔다. 그러면서 연주의 즐거움 또한 현격히 줄어들었다. 많은 스무드 재즈 연주자들은 프로그래밍을 배경으로 부드럽게 연주하는 것에 만족하곤 했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다. 그룹 포플레이가 대표적이다. 이 그룹은 도시적인 세련미, 부담 없는 편안한 사운드를 추구하면서도 여러 연주자들이 함께 하나의 지점을 향하는 연주의 즐거움 또한 잊지 않았다. 밥 제임스(건반), 리 릿나워(기타), 나단 이스트(베이스) 하비 메이슨(드럼) 등의 창립 멤버부터 이후 교체 멤버로 합류한 래리 칼튼, 척 로엡 같은 기타 연주자들까지 그룹을 구성한 연주자들 각각 솔로 및 리더로서 탄탄한 실력과 경험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유명 연주자들이 모인 밴드들이 모인 여타 슈퍼 밴드들이 화려한 기교적 표현에만 충실했던 것을 생각하면 네 연주자의 합을 넘어서는 단단한 안정감, 정서적인 부분 또한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놀라웠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네 연주자가 부드럽고 편안한 음악을 만드는 것 자체에 목적을 두고 연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즈를 중심으로 R&B를 중심으로 한 팝적인 성향, 라틴 음악적 정서 등을 결합한 결과였다. 그리고 이 요소들은 네 연주자가 평소 추구하던 것들이기도 했다. 그룹의 앨범들과 멤버 각각의 솔로 앨범들을 비교해서 들어보면 더욱 이해가 쉽다. 예로 1991년에 발매된 첫 앨범 <Fourplay>에 담긴 “Rain Forest”를 들어보자. 밥 제임스가 쓴 이 곡은 그대로 1990년대 밥 제임스의 솔로 앨범에 넣어도 괜찮을 정도로 건반 연주자의 느낌이 강하다. 리 릿나워와 밥 제임스가 함께 쓴 “Bali Run”은 기타 연주자의 80년대 음악을 연상시킨다. 또한 나단 이스트가 쓴 “101 Eastbound”는 이후 보다 명확히 전개될 노래하는 베이스 연주자의 음악을 생각하게 한다. 이처럼 그룹의 음악은 네 연주자들이 평소 해오던 음악의 합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네 연주자는 서로가 서로를 지원해주며 음악적으로 바라던 사운드를 구현해 냈다. (여기엔 네 연주자가 사으드맨으로서도 화려한 이력을 지닌 것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더 나아가 네 명의 합을 넘어선 포플레이의 음악으로 수렴했다.
리 릿나워에 이어 래리 칼튼, 척 로엡으로 기타 연주자가 이어지면서 그룹의 음악 또한 (부드럽게) 변화했는데 이 또한 그룹의 음악이 특정 리더가 아닌 네 연주자들의 민주적 어우러짐의 결과물임을 생각하게 한다. (그룹 이름이 Fourplay임을 생각하자.)
포플레이의 음악적 매력은 네 연주자들의 화합 외에 지속성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 독자적 영역을 구축한 유명 연주자들이 모인 슈퍼 밴드는 멤버의 강한 개성으로 인해 단발성 프로젝트에 그치곤 한다. 하지만 포플레이는 놀랍게도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그룹의 지속성은 역설적이게도 느슨한 구속에서 만들어졌다. 각 멤버들은 그룹 활동에만 매진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미 각자의 개성으로 유명할 대로 유명해진 연주자들이었기에 그룹 활동만 고집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그래서 멤버들은 평소처럼 독자적 활동에 집중하며 몇 년에 한 장씩 그룹 앨범을 녹음하는 것에 만족했다. 이것이 서두르지 않고 긴 호흡으로 그룹과 그 음악을 생각하게 했고 여유로운 연주, 편안한 음악으로 이어졌다. 그 사이 약간의 멤버 이동이 있긴 했다. 그 또한 자연스럽다 싶을 정도로 천천히 이루어졌기에 음악적으로도 급격한 질적 변화를 유발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존의 사운드를 살짝 비트는 신선한 차이를 주었다.
포플레이가 결성된 것은 밥 제임스의 역할이 컸다. 그는 1990년도 앨범 <Grand Piano Canyon>을 위해 당대 최고의 연주자들을 모아 다양한 편성으로 9곡을 녹음했다. 그 중 3곡을 리 릿나워, 나단 이스트, 하비 메이슨과 함께 연주했는데 그 결과가 유난히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이것이 솔로와 사이드맨 활동에 주력하던 네 연주자를 한 자리에 모이게 했다.
그렇게 해서 1991년에 발매한 첫 앨범 <Fourplay>에서 그룹은 완성된 연주자들이 모인 만큼 어느 하나 모자람 없는, 다음을 기약할 필요가 없는 뛰어난 음악을 선보였다. 평소 네 연주자의 음악을 들어온 감상자라면 기대했을 음악의 가장 이상적 결과였다.
글쎄. 어쩌면 네 연주자는 처음부터 오랜 시간 함께 활동을 하기로 약속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빌보드 컨템포러리 재즈 앨범 차트 1위, 빌보드 앨범차트 97위, 빌보드 R&B/힙합 차트 16위에 오르는 등 첫 앨범이 거둔 성과는 그룹을 쉽게 해산하지 못하게 했다.
네 연주자 모두가 곡을 쓰고 여기에 마빈 게이의 “After the Dance” 처럼 유명 팝 곡을 선택하고 엘 드바지 등의 게스트를 기용한 것부터 앞이 탁 트인 도로라고 마냥 질주하는 대신 주변 풍경을 느긋하게 감상하며 운전하듯 서로를 경청하여 이루어 낸 정치(精緻)하고 섬세한 어울림, 그리고 각자의 음악적 개성을 불어 넣어 재즈, 라틴, R&B를 자유롭게 섞어낸 사운드까지 첫 앨범의 성공을 가져온 요소들은 그대로 그룹의 음악적 공식이 되었다.
1993년에 발매된 앨범 <Between The Sheets>에서도 그룹은 각각 곡을 준비하고 최상의 어울림으로 연주하는 한편 대중적인 측면-R&B 친화적인- 또한 보다 명확하게 드러냈다. 1970년대 큰 인기를 끌었던 R&B 그룹 아이슬리 브라더즈의 “Between The Sheet”를 연주하며 나탄 이스트의 노래 외에 여성 보컬 파트너로 샤카 칸을 초대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 결과 이 앨범은 다시 빌보드 컨템포러리 재즈 앨범 차트 1위에 오르는 등 첫 앨범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
1995년에 발매되어 빌보드 앨범차트에 90주나 머문, 세 번째 앨범 <Elixir>도 포플레이의 매혹은 이어졌다. 말끔한 도시적 정서와 이국적인 정서가 어우러진 정교한 사운드와 필 콜린스(Why Can’t It Wait Till Morning), 피보 브라이슨과 패티 오스틴(The Closer I Get To You)을 불러 만든 대중적인 면은 그룹 멤버의 유명세를 생각할 필요 없이 그룹 자체를 스무드 재즈의 대표로 인식하게 했다.
앨범 활동을 끝으로 1997년 리 릿나워가 다른 프로젝트를 위해 그룹을 떠났다. 아마도 당시 기타 연주자의 음악이 스무드 재즈와 거리를 두고 웨스 몽고메리를 주제로 앨범 <Wes Bound>를 녹음하는 등 보다 전통적이고 보다 기타 연주가 중심이 된 음악에 경도되었던 것에 따른 일이 아닐까 싶다. 리 릿나워가 참여한 포플레이의 음악이 워낙 훌륭했기에 그의 떠남은 여러 모로 아쉬움이 컸다. 그러나 남은 세 연주자는 또 다른 퓨전, 스무드 재즈의 명 기타 연주자 래리 칼튼을 영입함으로써 위기를 해결했다.
래리 칼튼은 12년간 그룹에 머무르며 <4>(1998)부터 <Energy>(2008)에 이르기까지 크리스마스 앨범 포함 총 7장의 앨범을 함께 했다. 이들 앨범에서도 리 릿나워 시절에 확립한 포플레이 사운드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룹의 호흡은 탄탄했으며 작곡과 편곡 그리고 연주는 뛰어났다. 그 안에 담긴 부드러움도 변하지 않았다. “Sexual Healing”, “Fields of Gold”, “My Love’s Leavin'” 등 잘 알려진 팝 곡을 연주하거나 케빈 레타우, 베이비 페이스, 샹테 무어, 마이클 맥도날드, 에스페란자 스팔딩 등 게스트 보컬을 활용해 대중적인 면을 공고히 한 것도 그대로였다.
차이가 있다면 전임자의 연주가 라틴적인 맛이 강했다면 래리 칼튼의 연주는 블루지한 맛이 강했고 이것이 사운드에 새로이 스며들었다는 것이다. 2000년에 발매된 앨범 <Yes, Please!>에 담긴 “Blues Force”같은 곡이 그 예일 것이다. 하지만 이 차이는 멤버가 바뀐 결과일 뿐 근본적인 음악적 변화를 의미하지 않았다. 밥 제임스를 비롯한 다른 세 연주자들이 적절한 조절과 그 자체로 생명력을 얻은 그룹의 정체성이 포플레이의 매력, 장점을 유지시켰다.
2010년 래리 칼튼이 그룹을 떠나면서 그를 대신해 이번에는 척 로엡이 새로운 기타 연주자로 합류했다. 세 번째 기타 연주자가 합류한 그룹은 <Let’s Touch The Sky>(2010), <Esprit De Four>(2012), <Silver>(2015) 이렇게 석 장의 앨범을 녹음했다. 이 기타 연주자는 그에 앞서 활동했던 두 기타 연주자의 특성, 산뜻함과 블루지한 맛을 아우르는 연주로 기존 그룹의 음악에 적응하는 한편 <Silver>에서의 에너지 넘치는 연주로 그룹의 음악에 신선함을 불어넣었다.
척 로엡이 합류한 포플레이의 활동은 안타깝게도 기타 연주자가 2017년 7월 31일 만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막을 내렸다. 그의 사망이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던 것일까? 이후 그룹은 척 로엡의 투병 중일 때 임시로 색소폰 연주자 커크 웨일럼을 합류시켜 몇 차례 공연하다가 결국 2018년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2019년에 다시 활동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지금까지 그룹은 새로운 멤버를 영입 등 활동 관련 소식을 전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그룹이 그대로 해체되리라 생각하기에는 이른 것 같다. 코로나 19 펜데믹 상황에서 사람들의 건강을 바라는 메시지, 앨범 재발매 소식 등 많지는 않지만 꾸준히 홈페이지를 통해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는 그룹이 활동한 기간이 27년임에도 내가 30년 이상 그룹이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고 앞서 이야기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2021년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스무드 재즈는 이제 오래된 사조가 되었다. 대중의 관심이 R&B 외에 힙합에 글리고 있는 상황에 맞추어 그에 걸맞은 음악이 속속 등장하며 지금의 젊은 감상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스무드 재즈 또한 나이 지긋한 감상자들, 80, 90년대의 추억이 많은 감상자들을 위한 음악이 되었다.
그래도 포플레이의 음악만큼은 다를 수도 있겠다. 지난 몇 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다시 현재의 음악으로 너른 호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잘 만들고 잘 연주된 그룹의 음악과 그 매력은 탈시대적이고 통시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무드 재즈 위의 스무드 재즈였다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