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볼링(Claude Bolling, 1930.04.10 ~ 2020.12.29)

새로운 도전을 주저하지 않았던 전통적인 피아노 연주자

2020년이 저물기 직전인 12월 29일 클로드 볼링이 세상을 떠났다. 만 90세의 나이였고 사인은 구체적으로 공개되지 않았지만 현재 유행 중인 코로나 19 바이러스 감염증은 아닌 듯 하다.
그는 2014년 공식 활동을 멈춘 이후 은퇴의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활동을 접는 순간 삶의 마지막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적으로 세상을 떠나는 순간 음악인으로서는 그리 큰 아쉬움이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랬기를 간절히 바란다.)

클로드 볼링 하면 제일 먼저 1975년도 앨범 가 생각난다. 플루트 연주자 장 피에르 랑팔과 함께 녹음한 이 앨범에서 그는 바로크 음악 풍의 클래식과 스윙감 넘치는 재즈를 결합한 음악을 선보였다. 재즈와 클래식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은, 두 스타일이 자신의 매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사이 좋게 어울려 상쾌한 향을 발산했던 음악은 빌보드 클래식 차트에 530주나 머무를 정도로 높은 인기를 얻었다.
이 앨범 외에도 그는 장 피에르 랑팔과 (1983), (1987)를 녹음하는 한편 클래식 기타 연주자 알렉산더 라고야, 앙헬 로메로, 바이올린 연주자 핀커스 주커만, 트럼펫 연주자 모리스 앙드레, 첼로 연주자 요요 마,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엠마누엘 엑스 등과 앨범을 녹음하며 크로스오버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첫 앨범의 성공 덕에 이들 앨범 또한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지다 보니 그를 크로스오버 음악 작곡가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 하다. 나 또한 재즈를 제대로 듣기 전에 클래식 음악에 관련된 크로스오버 음악가로 그를 먼저 알았다. 그래서 그의 재즈 앨범을 일종의 외도처럼 한동안 이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글을 읽고 있는 재즈 애호가인 당신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그를 크로스오버 음악가로만 이해하는 것은 매우 단편적이다. 약 80년에 걸쳐 그는 매우 다채로운 활동을 펼쳤으며 그 가운데 재즈가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그는 1930년 4월 10일 프랑스 칸에서 태어난 그는 10대 초반 그는 트럼펫을 배우고 싶었던 자신의 의지와 달리 어머니의 강권으로 피아노를 배웠다. 피아노 외에 트럼펫, 드럼까지 연주했던 그의 피아노 선생은 그가 즉흥 연주에 뛰어난 소질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의 꿈을 적극 지원했다.
호텔 지배인이었던 그의 아버지 또한 재즈 전문지 <재즈 핫(Jazz Hot)>에서 주최한 “핫 클럽 드 프랑스(Hot Club De France)” 아마추어 경연대회에 아들을 참가시킬 정도로 그의 재능을 믿었다. 이에 아들은 그 해는 아니지만 다음 해에 우승하며 믿음에 보답했다.
경연대회 우승에 용기기를 얻어 클로드 볼링은 16세에 자신의 밴드를 결성하고 18세에 첫 앨범을 녹음하는 등 활동을 이어가 20대 중반, 리오넬 햄튼, 렉스 스튜어트, 로이 엘드리지, 벅 클레이튼 등 파리를 방문한 미국 연주자들과 함께 공연하는 실력 있는 재즈 연주자로 성장했다.

그가 20대였던 1950년대 재즈는 비밥, 쿨 등 모던 재즈가 지배하던 때였다. 그러나 그는 이보다 전 세대의 음악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의 연주 또한 스트라이드, 스윙, 부기 우기, 블루스 등 비밥 이전의 스타일을 추구했다. 당시로서도 다소 복고적이라 싶었을 연주였지만 그럼에도 그의 연주는 인기를 얻었다. 그것은 스타일과 상관 없이 연주를 잘했기 때문이었다. 날렵한 그의 움직임은 익숙한 스타일 속에서도 신선한 분위기를 만들어낼 줄 알았다.
비밥 이전 시대의 음악 중에 그는 듀크 엘링턴의 음악을 좋아했고 그만큼 탐구했다. 작가이자 재즈 평론가였던 보리스 비앙으로부터 “볼링턴(Bollington)”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이것은 1956년에 클로드 볼링 빅 밴드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약 60년간 이 밴드를 유지하며 그는 스윙 재즈의 매력에 프랑스적 감성이 어우러진 낭만적인 빅 밴드 음악을 선보였다. 그가 은퇴한 2014년 이후에도 이 밴드는 1985년부터 밴드에서 드럼을 연주해 온 뱅상 코르델레트의 지휘 아래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마치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처럼 말이다.

한편 1965년 그는 널리 알려진 모차르트의 곡을 스트링 섹션이 가미된 스윙 스타일로 편곡해 연주한 밝고 경쾌한 분위기의 앨범 를 선보였다.
클래식과 재즈를 아우른 이 앨범의 신선한 음악 때문이었을까? 당시 프랑스의 인기 TV 음악 프로그램이었던 의 제작진으로부터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을 써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장 베르나르 포미에와 함께 연주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당시에는 한 장의 앨범, 하나의 방송을 위한 작은 기획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재미 있는 기획은 앞서 언급한 놀라운 크로스오버 음악 활동으로 이어졌다.
의 제작진이 클로드 볼링에게 특별한 피아노 곡을 의뢰한 것은 앨범 외에 그의 작, 편곡활동도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그는 보리스 비앙의 곡들을 편곡하는 한편 샤샤 디스텔, 자클린 프랑수아, 줄리엣 그레코, 앙리 살바도르, 브리짓 바르도 등 당대의 유명 가수들을 위해 곡을 직접 쓰거나 편곡했다. 심지어 자신이 쓴 곡을 전문으로 노래하는 4인조 걸 그룹 레 파리지엔느를 기획하기도 했다.
영화 음악 작, 편곡 또한 20대 초반부터 꾸준히 했다. 특히 르네 클레망 감독의 1963년도 영화 는 그를 영화 음악 작곡가로 주목하게 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자끄 데레이 감독의 (1969)를 비롯해 (1972), (1975), (1979) 등 100편 이상의 영화 음악을 담당했다.

이처럼 클로드 볼링은 재즈를 중심으로 대중 음악, 영화 음악, 크로스오버 음악 등 다양한 스타일을 가로지르는 활동을 했다. 이것은 그만큼 그의 삶 또한 재즈적이었음을 의미한다. 피아노 연주는 고전적이었지만 그는 새로운 시도, 새로운 도전을 주저하지 않았다. 2014년 활동을 멈춘 것도 어쩌면 음악적인 선택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2000년 무렵 나는 파리에서 그의 빅 밴드 공연을 본 적이 있다. 공연을 마치고 무대 옆에서 약 10초간 그와 눈을 마주쳤다. 호기심이 담긴 시선이었다. 희미한 미소로 끝난 그 10초의 마주침이 지금 선명하게 떠 오른다. 애도의 마음으로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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