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7일 보컬이자 피아노 연주자였던 프레디 콜이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심혈관 질환에 의한 합병증이라 한다. 만 88세로 우리 식으로 계산하면 90세였으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가 요즈음 유행하는 코로나 19 바이러스 감염이 사망 원인이 아니었다는 것에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적어도 황망한 죽음은 아니니 말이다.
1931년 10월 15일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난 그는 군고구마처럼 따스하고 구수한 톤으로 노래가 아닌 이야기를 하듯 노래했다. 과한 기교를 부리지도 않았다. 그저 주어진 멜로디와 리듬을 적절히 따르며 자기 흥에 따라 노래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마음 맞는 친구 혹은 삼촌과 편안한 대화를 나누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곤 했다.
그러나 그의 큰 형이 재즈 보컬의 전설로 남은 냇 킹 콜이었기에 평생 그는 형과 비교하는 시선 속에 노래해야 했다. 실제 그의 노래를 듣다 보면 종종 냇 킹 콜이 연상되기도 했다. 특히 그가 형이 사망할 무렵인 1964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이 이러한 비교를 불러일으킨 것 같다. 사람들은 냇 킹 콜의 노래와 음악이 12살 어린 동생 프레디 콜로 이어졌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1976), (1991) 등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했다.
그렇다고 냇 킹 콜을 형으로 둔 것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는 6세 때에 다른 형제들처럼 피아노를 배우긴 했지만 미식 축구 선수를 꿈꾸었다. 그러나 부상으로 인해 멈추어야 했다. 이 때 재즈 보컬의 길로 이끈 것이 바로 냇 킹 콜이었다. 그래서인지 1992년 같은 앨범을 녹음하기도 했다. 또한 LA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형과의 차이는 감상자에 따라 다를 수 있으며, 자신의 관심은 좋은 음악을 하는 것, 최대한 멋진 공연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초연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자세는 그의 음악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그 결과 1990년대부터 그는 제대로 된 평가와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2006년 그의 진면모를 인식시킨 다큐멘터리-1976년도 앨범 타이틀을 제목으로 한-가 제작되고, 2007년 그가 생을 마감한 조지아 주의 명예의 전당에 오른 것, 2010년도 앨범 이나 마지막 앨범 가 그래미상 후보에 오른 것이 좋은 예이다.
따라서 그의 삶을 ‘인정투쟁(認定鬪爭)’으로 정리할 필요는 없다. 그는 자기 식으로 노래하고 연주했다. 굴곡이야 있었겠지만 그래도 평온한 삶이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