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부는 날에는 재즈를

2019년 10월 31일 소리샵에서 있었던 음악 감상회 소개글이다.

낭만.

가을을 두고 사람들은 낭만의 계절이라고 부르곤 한다. 그래서 평소 건조하게 살던 사람들도 찬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면 괜히 가던 길을 멈추고 하늘을 보게 된다. 그리고 한 줌의 따스함을 그리워한다.

낭만.

이 말은 또한 재즈에 대해 사람들이 품고 있는 느낌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재즈를 어려워하면서도 그 음악 어딘가에 낭만 한 조각이 숨겨져 있으리라 믿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재즈는 낭만적인 음악이다. 하지만 모든 음악이 낭만적이지 않은 것처럼 모든 재즈 곡이 낭만적이지는 않다. (모든 재즈가 어려운 것도 아님 또한 생각하자) 다만 낭만적일 땐 그 정도가 치명적이다.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이 곳이 아닌 저 곳을 동경하게 만든다.

이렇게 낭만의 이미지가 겹치기 때문일까? 재즈는 가을에 들으면 그 맛이 더욱 깊다. 나 같은 경우 어렵다고 하는 곡들마저 한층 편하게 들릴 정도다.

그 가운데 가을이면 유난히 더 듣고 싶은 곡들이 있다. 이들 곡들은 언제나 나를 가슴 뭉클하게 한다. 나아가 잠시나마 복잡한 현실을 잊고 부유(浮遊)하게 만든다.

먼저 연주곡을 들어볼까? 베이스 연주자 찰리 헤이든이 이끌었던 그룹 쿼텟 웨스트의 “Here’s Looking At You”가 먼저 생각난다. 이 베이스 연주자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할리우드 영화를 보았던 아련한 추억을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쿼텟 웨스트를 결성했다.

이 곡이 담긴 1996년도 앨범 <Now Is The Hour>도 그랬다. 빅터 요르겐센이 2차 대전에서 일본에 승리한 날인 9월 2일에 뉴욕 타임 스퀘어에서 키스하는 연인을 찍은 유명한 사진을 표지로 한 이 앨범은 복고적인 아련한 향취로 가득하다.

그 중 “Here’s Looking At You”는 색소폰의 조금은 텁텁한 질감과 서정적인 멜로디가 현재가 아닌 과거를 그리게 한다. 복잡한 미사 없이 그저 “사랑한다”는 말 하나면 마음이 전해지던, 나 또한 살아보지 못한 과거의 영화 같은 날로 나를 이끈다. 특히 곡의 시작을 알리는 스트링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나뭇잎을 떨구는 스산한 가을 바람 같아서 이 맘 때면 이 곡을 추억하게 만든다. 생각해보니 어느덧 이 곡을 처음 들었던 1996년도 이젠 내게 먼 과거의 청춘 시절이 되었다.

가을 하면 나뭇잎이 떨어지는 풍경을 빼놓을 수 없다. 나뭇잎이 바람을 타고 하나 둘 떨어지는 모습은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막상 낙엽 가득한 길을 걸으면 그리 쓸쓸하지 않다. 나뭇잎의 화사함 때문이다. 꽃처럼 붉고 노란 잎들이 떨어지는 풍경의 아름다움이 쓸쓸함을 잊게 해준다.

색소폰 연주자 캐논볼 아들레이가 트럼펫 연주자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 1958년 앨범 <Somethin’ Else>에서 연주한 “Autumn Leaves”는 바로 떨어지는 나뭇잎으로 낭만적인 가을의 거리를 그리게 한다.

자끄 프레베르의 시에 멜로디를 붙여 이브 몽탕의 노래로 유명한 샹송 “Les Feuilles Mortes”를 연주한 이 곡은 보통 사람의 걷는 속도에 맞춘 듯한 템포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마일스 데이비스의 뮤트 트럼펫 연주부터 캐논볼 아들레이의 알토 색소폰 솔로와 행크 존스의 피아노 솔로에 이르기까지 모두 무겁지 않다. 그것이 헤어진 옛사랑의 추억을 주제로 한 원곡의 가사에서 벗어나 가을이 주는 낭만을 즐기며 산책하는 사람을 그리게 한다. 이러한 가벼움은 어쩌면 그룹이 이 곡을 봄에 녹음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가을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한편의 서정시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 시 같은 연주 하면 나는 키스 자렛의 솔로 연주를 생각하곤 한다.

키스 자렛은 아무런 준비 없이 무대에 올라 그 순간의 느낌에 따라 자유로이 한 시간 가량을 연주하는 즉흥 솔로 콘서트로 재즈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게다가 그 연주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인간의 창작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 깨닫게 해줄 정도였다.

그의 유명한 솔로 콘서트 앨범 중에는 1976년 11월 5일부터 18일까지 2주에 걸쳐 일본의 5개 도시를 돌며 가졌던 공연을 정리한 <Sunbear Concerts>가 있다. LP로는 10장 CD로는 6장으로 정리된 박스세트 앨범인데 원래는 최고라 생각되는 콘서트 하나만 선정해 한 장의 앨범으로 발매하려 했는데 모든 공연이 다 좋아서 모두 발매하게 되었다 한다.

그 가운데 가을이면 나는 도쿄 공연에서의 앙코르 연주를 가을이면 듣는다. 원래 제목이 없고 그냥 “Encore (from Tokyo)”라 불리는 이 연주는 순간에 의존해 연주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멜로디가 선명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무대에서 키스 자렛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슬프고 슬프다.

그 슬픈 연주와 영롱하면서도 흐릿한 맛이 감도는 피아노 톤에서 나는 안개 자욱한 풍경을 떠올리곤 한다. 안개는 이른 새벽 호수에서 피어 오른다. 그 뒤로 노랗고 붉게 물든 나뭇잎이 안개로 인해 채도 낮게 보이는 숲길이 있다. 그 길을 나는 홀로 걷는다.

키스 자렛의 도쿄 콘서트 앙코르 연주와 함께 첼로 연주자 데이빗 달링의 1982년도 앨범 <Cycles>에 담긴 “Cycle Song”도 가을이면 자주 듣는다.

키스 자렛의 솔로 콘서트 연주에서도 느꼈겠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재즈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미지와는 다른 스타일로 분화를 거듭했다. 이 곡도 그런 경우다. 첼로, 시타르 등 재즈와 거리가 있다고 여겨졌던 악기들이 모여 서정적 풍경을 그린다.

촉촉한 울림을 주는 피아노, 신비한 음색의 시타르, 그리고 슬픔 가득한 첼로 연주를 들으면 나는 현실을 피하기 위해 도시를 벗어난 여행자를 상상하곤 한다. 새로운 무엇을 찾아 달리고 달렸지만 도착한 곳은 허허 벌판. 모든 것이 사라진 벌판 앞에서 그는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참 비극적인 상상이다. 그러나 상상은 상상일 뿐. 그런 극한 상황에 나를 두는 상상은 오히려 내게 이곳에서 버티고 살아갈 힘을 준다.

노래를 들어볼까? 가을이면 무엇보다 쓸쓸한 노래, 슬픈 노래가 마음에 들어온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던 존재의 외로움, 슬픔이 살짝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그럴 땐 애비 링컨이 1995년 앨범 <A Turtle’s Dream>에서 노래한 “Throw It Away”을 듣곤 한다. 이 곡에서 애비 링컨은 슬픔을 안으로 꾹 누른 듯 먹먹한 느낌으로 노래한다. 중간에 흐르는 팻 메시니의 기타 솔로도 우수 가득하다. 노래만으로 분명 이 곡은 슬픈 곡이다.

하지만 가사는 조금 다르다. 모든 것을 버리라 한다. 사랑을 주고 나만의 삶을 살라고 한다. 손을 크게 멀리고 햇살이 들어오게 하면 결코 상실감을 느낄 일이 없다고 한다. 그것이 내 것이라면 이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말이다. ‘

노래와 가사가 조금은 다른 분위기에서 나는 실제로는 잃었지만 이를 극복하려는 슬픈 의지를 본다. 그리고 이것이 가을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나뭇잎이 떨어지고 한 해의 시간이 노을 지는 무렵 말이다. 그 공허함 참고 우리는 하던 일을 계속한다.

빌리 할리데이의 1958년도 앨범 <Lady In Satin>에 담긴 “I’m A Fool To Want You” 또한 슬픔으로 가득한 곡이다. 곡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 곡은 내게는 시선을 두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아픔을 담은 곡이다. 누가 불러도 슬플 수 밖에 없는 곡인데 빌리 할리데이는 이를 더욱 슬프게 노래한다. 건조하게 갈라진 목소리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아픈 목소리는 그녀의 삶에서 만들어졌다. 유명해지고 나서까지 인종 차별을 받았고 사랑했던 남자들로부터는 이용만 당했던 그녀는 이를 이기지 못하고 술과 마약에 빠졌다. 그 결과 청춘 시절 희망을 담고 있던 목소리는 닳고 바래 이렇게 절망적인 것으로 변했다.

특히 1958년 2월 이 곡을 노래할 당시 그녀의 목소리는 녹음 연기를 걱정할 정도로 최악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술병을 옆에 두고 노래를 강행했다. 따라서 이 곡은 다른 어느 때가 아닌 1958년 2월에만 가능했던 것이라 하겠다.

이 노래가 슬픈 것은 비극적인 그녀의 삶이 투영되었기 때문이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애써 감추고 극복하려 하지 않고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젠 모든 슬픔, 실연의 아픔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식으로 노래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는 나를 좀 구해줘요. 하는 마음으로 노래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쳇 베이커 또한 영화처럼 비극적 삶을 살며 그에 걸맞은 음악을 남겼다. 트럼펫을 불며 노래까지 했던 그의 삶은 몇 해 전 영화 <Almost Blue>가 나올 정도로 극적이었다. 그의 삶을 극적이게 했던 것은 마약이었다. 그는 재즈보다 마약을 더 좋아했다. 마약을 위해서라면 나쁜 일도 서슴없이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음악은 무척 낭만적이었다. 특히 1987년도 앨범 <Chet Baker In Tokyo>에 담긴 “Almost Blue”가 그렇다. 보통 그를 대표하는 곡으로 “My Funny Valentine”을 꼽곤 하는데 나는 이 곡이야 말로 그의 음악 미학의 극치를 담고 있다고 본다.

나는 그가 마약에 빠져 평생을 살았던 것은 혼자 있고 싶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뛰어난 실력으로 유명해졌지만 그는 이를 기꺼이 누리지 않았다. 오로지 마약, 마약뿐이었다. 마약에 취해 있을 때만 그는 세상을 잊고 자신만의 세계에 안주할 수 있었다.

“Almost Blue”에서 그는 어쩌면 그가 마약에 취하면 느꼈을 지도 모르는 절대 고독의 한 가운데로 우리를 데려간다. 어두운 공간, 깊고 푸른 심연을 지닌 그곳에 혼자 조용히 앉아 있는 나를 상상하게 한다. 이 고독의 공간에는 실연의 슬픔, 사랑의 그리움이 없다. 오히려 그 공간은 홀로 있음의 안락함, 자연인으로서의 나를 느끼게 한다. 이런 고독이라면 가을은 외로운 계절이 아니다.

한편 지미 스콧의 1998년도 앨범 <Holding Back The Years>에 담긴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는 가을이면 떠오르는 사랑의 아픈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건조한 목소리로 마른 눈물을 흘리듯 부르는 지미 스콧의 목소리가 가슴을 아프게 한다. 빌리 할리데이가 삶이 준 목소리로 노래했다면 리틀 지미 스콧은 신이 내린 목소리로 노래했다. 그는 유전적 이상으로 사춘기와 성장이 지연되는 칼만 증후군을 앓았다. 그래서 남성이면서도 여성적인 분위기의 목소리를 지니게 되었다.

이 곡은 엘튼 존의 히트 곡을 노래한 것이다. 담담한 분위기의 피아노 위로 한번의 실수로 돌이킬 수 없게 악화된 사랑을 그는 후회 가득한 느낌으로 노래한다. 그것이 내가 잘못해서 헤어진, 그 때는 내가 아픔을 상대에게 준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사랑을 추억하게 한다.

바람 부는 가을에는 부디 이별하지 말자. 차라리 꽃 피는 봄에 이별하자. 그러면 덜 외로울 것이다. 덜 후회될 것이다.

한편 줄리 런던이 1965년 앨범 <All Through The Night>에서 노래한 “Ev’rytime We Say Goodbye”도 나뭇잎이 떨어지는 가을에 들으면 남다른 맛을 준다. 제목처럼 이 곡은 이별을 주제로 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가 헤어지면 내가 조금씩 죽는 것 같다고 한다. 그와 함께 곡은 밝은 풍의 메이저 코드로 시작해 우수 어린 마이너 코드로 마감되어 슬픔을 표현한다.

그런데 나는 이 곡을 들으면 이별의 아픔 이전에 그에 대한 위로, 위안을 느끼곤 한다. 줄리 런던의 따스한 이불 같은 목소리 때문이다. 나뭇잎 덜어지는 가을 풍경이 쓸쓸함과 함께 낭만을 동시에 느끼게 하듯 말이다.

배리 매닐로우의 “When October Goes”는 10월 마지막 날이면 이용의 “잊혀진 계절”처럼 한번씩 듣게 되는 곡이다. 1984년도 앨범 <2:00AM Paradise Café>에 담긴 이 곡은 시월이면 떠오르는 지난 시절의 추억, 사랑했던 사람과의 행복했던 시간-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한-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이 곡 속 시월은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시월이다. 어디가 시월부터 눈이 내리는지. 그 곳의 가을은 그래서 더 쓸쓸할 것이다.

이렇게 바람이 쓸쓸한 가을이면 생각나는 곡들을 소개해보았다. 사실 재즈를 어려워한다면 그것을 재즈를 특별하게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즈는 그렇지 않다. 다른 음악처럼 집중해서 오래 들어야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단번에 마음에 쏙 들어오는 것이 공존한다. 그 중 내 취향, 내 마음에 따라 골라 들으면 그만이다.

그렇기에 나 또한 개인적인 느낌을 우선으로 선곡해 그것을 중심으로 이야기했다. 부디 당신 또한 나와 내 생각에 공감하길 바란다. 아니어도 상관 없다. 그렇다면 당신을 위한 다른 곡들이 있을 것이니. 재즈는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 수만큼이나 다양하고 많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