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아이스>는 1993년에 발간된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다. 시리즈이지만 첫 작품 <블랙 에코>를 읽지 않아도 상관 없다. 그래도 주인공과 시대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작을 읽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물론 전작만큼은 아니지만 주인공이 베트남전에서 “땅굴 쥐”로 활동했었고 수사 중 문제로 LA 경찰국 본부에서 할리우드 지서로 좌천된 상황 설명은 나오긴 한다.
이번 작품에서 해리 보슈의 임무는 동료 경찰-마약 수사를 전담했던-의 자살 사건이다. 그에게 배당된 사건은 아니었고, 절대 참견하지 말라는 상관의 지시도 있었지만 그는 이 사건이 보통의 자살 사건이 아님을 감지한다. 그런 중 경찰 생활의 피로로 사직을 결심한 동료의 사건을 대신 처리하면서 그것이 동료 경찰의 자살 사건과 연관이 있음을 알고 독자적인 방식으로 수사에 개입한다.
작가는 이러한 수사 과정을 밀도 높은 서술로 빠져들게 한다. 독자로 하여금 경찰 상관을 의심하게 하고 동료를 이심하게 한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반전으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묘미를 선사한다.
하지만 이 소설의 매력은 사건의 발생과 해결을 치밀하게 직조한 것이 아니라 사건에 관계된 인물들의 입체성에 있다. 이번 부분이 전작보다 이번 소설을 더 좋게 바라보게 한다. 특히 총으로 자신의 얼굴을 날려버리는 방식으로 생을 마감한 무어 형사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그로 인한 이혼 등의 상황 묘사는 사건의 전개 속에서 이런저런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해리 보슈 또한 이를 조사하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정체성을 고민한다.
이것은 자연스레 독자가 해리 보슈를 이해하는 단서로 이어진다. 그는. 매춘녀였던 어머니와 당시 능력을 인정받던 변호사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가정이 있던 아버지는 그를 외면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지옥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이름을 그대로 아들의 이름으로 정한 그의 어머니는 친부를 그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제대로 키우지 못해 해리 보슈는 위탁가정과 청소년원을 전전하며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죄를 짓고 복역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소설에서 그의 어린 시절을 상기시키는 소년범에게 새로운 삶을 고민할 기회를 주기도 한다.
이러한 회상을 통해 작가는 해리 보슈가 죽음에 임박한 아버지를 찾았고 그로부터 암시적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음을 설명한다. 이와 함께 그의 배다른 형제 미키 할러를 언급한다. 장례식장에서도 해리 보슈는 형제를 모른척했고 그것은 소설 속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마도 이 작품을 쓸 때까지만 해도 미키 할러는 그냥 아주 작은 언급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미키 할러는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를 시작으로 새로운 시리즈의 주인공이 된다. 이런 묘미가 있으니 어찌 해리 보슈 시리즈를 차근차근 읽지 않을 수 있을까?
한편 형사 사망 사건이 주축이 된 이번 소설을 통해 작가는 LA 경찰국의 부패를 보다 직접적으로 묘사한다. 여기에는 작가가 LA 타임즈의 범죄 담당 기자 경력이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아무튼 실적 중심에 부조리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조직의 특성이 세세하게 묘사되면서 해리 보슈가 파트너도 없는 아웃사이더 수사관이 된 이유를 설명한다.
이번 첫 소설에서 로맨스가 있었듯이 이번 소설에서도 해리 보슈는 두 명의 여인과 로맨스를 만든다. 그런데 이 부분은 다분히 상업적이다. 상업 영화에서 줄거리와 크게 상관 없는 장면에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남녀의 정사 장면을 넣듯이 작가 또한 그렇게 로맨스를 활용했다. 사건의 전개에는 섬세한 작가가 로맨스에서는 단지 해리 보슈의 고독한 매력만으로 여성을 단번에 넘어오게 하는 설정을 취한 것은 분명 아쉬운 부분이다. 이 부분은 마초적인 주인공의 이미지를 넘어 추리 소설 장르 자체를 마초적인 것으로 이해하게 한다.
이번 소설에서도 해리 보슈는 재즈를 듣는다. 존 콜트레인의 “Song Of The Underground Railroad”, “Spiritual” 같은 후기 연주와 프랭크 모건의 “Lullaby”가 나온다. 게다가 그는 마음에 든 여인이 자신과 통하는 부분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뜬금 없이 “재즈를 좋아하냐”고 묻는다. 조금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장면이긴 한데 그만큼 주인공이 고독함을 느끼게 해주는 장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