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의 애환을 진솔하게 노래했던 보컬
여름철 우리가 즐겨먹는 음식 중에는 냉면이 있다. 나도 냉면을 즐긴다. 이 냉면은 물냉면과 비빔 냉면으로 나뉜다. (회냉면도 있지만 이는 비빔 냉면의 일종으로 분류하자.) 그 중 물 냉면은 차가운 얼음 육수가 체온을 떨어뜨리는 이랭치랭(以冷治冷)의 방식으로 더위를 잊게 만든다. 반면에 비빔 냉면은 매콤한 양념장이 온몸에 땀을 나게 하는 이열치열(以熱治熱)의 방식으로 더위를 잊게 한다.
그렇다면 재즈를 냉면에 비유한다면 어떨까? 물냉면에 가까운 재즈-이를 테면 긴장과 이완을 오가며 감정의 커다란 기복 없이 나른하게 리듬이 바다를 생각하게 하는 보사노바나 말 그대로 선선한 쿨(Cool) 재즈 같은-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재즈는 후끈거리는 비빔 냉면에 가깝지 않나 싶다. 실제 치열하게 교감하는 연주자들의 숨막히는 연주를 듣다 보면 절로 체온이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그래서일까? 재즈는 추울 때 더 어울리는 것 같다.
그러나 무더운 여름 날, 이열치열(以熱治熱)의 비빔 냉면을 먹듯 뜨거운 재즈가 여름을 시원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나 같은 경우 니나 시몬의 노래들이 그렇다. 여기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한 몫 했다. 그녀는 여자로서는 가장 낮은 음악대에 해당하는 콘트랄토 보이스를 지녔다. 그래서 중성적인 느낌마저 나는데 나 같은 경우 처음에 그녀의 노래를 듣고 남자가 노래하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이렇게 무더운 여름 날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천천히 ‘Don’t Let Me Be Misunderstood’나 ‘Wild Is The Wind’같은 팝 명곡을 재즈로 노래한 곡들을 듣고 나면 후끈거리는 찜질방에서 땀을 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면 한 줄 미지근한 바람에도 시원함을 느끼게 된다.
한편 그녀의 목소리 외에 그녀의 노래에 담긴 흑인적인 정서 또한 뜨거운 여름을 느끼게 한다. 나는 니나 시몬이야 말로 흑인적인 정서를 가장 훌륭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녀가 재즈 이전에 블루스, 가스펠, 소울을 잘 소화했기 때문이다. 이들 음악을 그녀는 형식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대신 그 안에 담긴 흑인의 근본적인 정서를 표현하는데 더 주력했다. 그래서 그녀의 노래 기저에는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미국으로 끌려와 목화 밭에서 땀 흘리며 일하던 초창기 흑인 노예들의 슬픔과 회한이 깊게 자리잡고 있다. 그 결과 그녀의 노래를 듣다 보면 절로 고된 흑인들의 노동 현장이 떠 오르고 이것이 무더위와 연결되는 모양이다.
이렇게 그녀가 흑인의 아픔을 잘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노래를 시작했던 1950년대 후반에도 여전히 미국 사회에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여전했고 따라서 이로 인한 흑인들의 울분이 깊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녀 또한 인종차별을 겪기도 했다. 세 살부터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하여 열두 살 무렵에는 공연을 하기도 했던 그녀는 재즈 보컬이 아닌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의 삶을 꿈꿨다. 그래서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커티스 음악원에 입학하고자 했다. 하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거절 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꿈을 포기하고 학업을 지속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지역의 클럽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하던 것을 직업으로 계속 해야 했다. 그러면서 본명인 유니스 캐서린 웨이먼을 버리고 남자 친구가 지어준 니나 시몬-어린 여자를 의미하는 Nina와 프랑스의 명배우 시몬느 시뇨레(Simone Signoret)의 이름을 결합한-으로 이름을 바꿨다.
재즈를 노래하는 니나 시몬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커티스 음악원의 결정에 감사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인종차별로 인해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 했던 아픈 경험이 그녀에게 다른 누구보다 흑인의 애환을 노래에 담게 했음은 분명하다. 실제 그녀에게 첫 성공을 가져다 주었던 앨범 <Little Girl Blue>의 타이틀 곡이나 첫 히트 곡 ‘I Loves You Porgy’를 들어보면 속으로 참고 또 참아 관조적인 느낌마저 나는 흑인의 애환이 강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첫 앨범의 성공 이후 콜픽스 레이블에서 녹음한 앨범들에서 한층 더 깊어진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원초적인 흑인 정서의 표현은 필립스 레이블로 이적한1964년 이후 사회 참여적인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이어졌다. 당시 미국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주도로 흑인 인권운동이 한창이었다. 이에 관심을 보이면서 그녀는 ‘Mississippi Goddam’처럼 당시의 인권운동을 반영한 곡들을 노래했다. 그리고 빌리 할리데이를 통해 흑인의 애환을 담아낸 곡으로 유명해진 ‘Strange Fruit’을 선배에 버금가는 슬픔을 담아 내 노래하는 한편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과 관련된 ‘Images’를 노래하기도 했다. 그리고 직접 흑인 가운데 여성들의 삶을 반영한 ‘Four Woman’이란 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 곡들에서도 그녀는 흑인의 애환을 꾸밈없이 마음을 담아 표현했다.
그녀의 사회 참여적 성향은 70년대 베트남 전쟁 반대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로 인해 그녀는 미국을 떠나 바르바도스, 리베리아, 네덜란드, 스위스, 네덜란드 등을 떠도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다가 프랑스에 정착하여 미국을 오가는 활동을 하다가 1992년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흑인의 근본적인 정서를 노래하는데 주력했고 사회 참여에 적극적이었다고 해서 그녀가 음악의 형식이나 장르적인 측면에서 약점을 보였다거나 대중성이 약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오히려 그녀는 클래식을 공부했던 만큼 작사, 작곡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으며 간간히 노래 중간에 뛰어난 피아노 연주실력을 보이기도 했다. 예로 그녀의 히트 곡 가운데 하나인 ‘Love Me or Leave Me’에서는 바흐의 영향을 느끼게 해주는 그녀의 솔로 피아노 연주를 들을 수 있다. 또한 그녀는 록, 팝, 샹송, 세계 민요 등 그녀의 마음에 드는 곡이면 가리지 않고 노래했다. 그리고 그 노래들은 그녀의 스타일로 바뀌었으면서도 변함 없는 대중적인 매력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나는 니나 시몬이 엘라 핏제랄드, 빌리 할리데이, 사라 본 등 흔히 재즈의 3대 디바라 불리는 보컬들의 곁에 위치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현실이 그렇지 못했던 것은 그녀가 일단 3대 디바들에 비해 한 세대 이상 나이가 어렸다는 것-그녀가 등장했을 때 3대 디바는 이미 결정된 상태였다!- 장르를 가로지르는 활동을 했기에 재즈적인 맛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것, 그리고 백인들의 구미에 맞지 않은 사회활동 때문이었다고 본다. 그래서인지 4대 디바를 이야기하기 전에 재즈사에서 그녀의 위상은 번 외의 장소에 있는 것 같다. 순위 밖에서 독특한 개성으로 특별히 언급되는 수준이랄까? 하지만 이것 저것을 다 떠나 요즈음 유행하는 표현대로 돌 직구처럼 곧바로 가슴에 꽂히는 노래를 듣게 되면 저절로 그녀의 위상이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적어도 무더운 여름 날 땀을 뻘뻘 흘리며 그녀의 노래를 들을 때만큼은 말이다.
대표 앨범
Anthology: The Colpix Years (Rhino 1996)
정규 앨범을 추천하는 것이 좋겠지만 보컬들의 경우는 베스트 앨범을 듣는 것이 그의 음악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기에 더 좋다고 생각된다. 1996년에 발매된 이 앨범은 니나 시몬의 초기에 해당하는 콜픽스 레이블에서의 활동을 정리한 것이다. 두 장의 CD에 총 40곡이 담겨 있는데 Black ‘Is the Color of My True Love’s Hair’, ‘Nobody Knows You When You’re Down and Out ‘ 등 다듬어지지 않은 듯 있는 그대로 흑인의 정서를 표현하는 니나 시몬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 그 외에 빌리 할리데이의 ‘Fine & Mellow’를 비롯하여 ‘House Of Rising Sun’, ‘Trouble In Mind’ 등의 곡들이 그녀가 다양한 장르의 곡들을 마음껏 노래했음을 확인하게 한다.
Don’t Let Me Be Misunderstood (Philips 1989)
콜픽스 레이블을 떠난 니나 시몬의 다음 정착지는 필립스였다. 이제는 버브 레이블로 통합된 이 레이블에서 활동했던 시기야 말로 그녀의 최 전성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 가운데 1989년에 발매된 이 모음집은 그녀의 필립스 시절을 가장 잘 정리하고 있다. 타이틀 곡을 비롯하여 ‘Wild Is The Wind’, ‘Love Me or Leave Me’, ‘Strange Fruit’, ‘I Loves You, Porgy’, ‘I Put A Spell On You’ 등 그녀를 대표하는 곡들이 거의 모두 담겨 있는데 이들 곡들은 그녀가 빠른 템포에서건 느린 템포에서건 묵직한 저음과 절규하는 듯한 목소리로 흑인의 끈끈한 정서를 잘 표현했음을 확인하게 한다. 니나 시몬의 정수를 담은 앨범이라 할만하다.
Nina Simone Sings the Blues (RCA 1967)
필립스를 떠난 니나 시몬은 RCA 레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 앨범을 녹음했다. 앨범 타이틀이 의미하듯 블루스를 주제로 한 이 앨범에서 그녀는 블루스에 대한 탁월한 소화력을 보여준다. 그 소화력은 역시 흑인 정서에 대한 깊은 이해와 표현에 기인한 것이다. 특히 ‘My Man’s Gone Now’는 다른 여러 버전들 사이에 가장 빛나는 결정판이라 할 만큼 인상적이다. 이 외에 많은 대중적 사랑을 받았던‘I Want a Little Sugar in My Bowl’, 흑인 인권운동과 관련된 랭스턴 휴즈의 시를 노래한‘Backlash Blues’, 보컬 외에 니나 시몬의 피아노 연주도 맛볼 수 있는 ‘Do I Move You?’등의 곡이 블루스를 노래하는 니나 시몬의 매력을 맛보게 해준다.
저는 파스텔 블루스 앨범 듣다가 너무 남자목소리여서 아 작곡 연주만 하고 보컬은 따로 부른건가 했는데…
본인이 부른거 알고 깜짝 놀랐네요..
네 콘트랄토 목소리라서 매우 남성스럽죠. ㅎ 그것이 그런데 매력이구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