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 포터(Gregory Porter)

마음을 담은 노래로 감상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보컬

 

더부룩한 수염에 미소가 노래를 듣기 전부터 친근함을 불러 일으킨다. 게다가 (우리는 보통 군밤장수 모자라 부르는) 귀는 물론 볼까지 덮은 모자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편안한 느낌을 더욱 강화한다. 그래서 그가 굵은 바리톤의 목소리를 지녔고 노래 또한 푸근한 느낌을 줄 것 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가 누군가 하면 바로 그레고리 포터다. 실제 그의 노래는 템포와 상관 없이 세상사를 다 알고 있는 사람의 공감, 당신의 마음을 다 이해하고 있는 사람의 위로처럼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몇 해 전부터 그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남성 재즈 보컬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 인기는 큰 이변이 없는 한 오래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와 냇 킹 콜 속에 보낸 어린 시절

 

이해와 공감의 정서로 대표되는 그레고리 포터의 음악적 매력은 천부적인 목소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삶도 큰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과거 빌리 할리데이의 노래가 그녀의 고된 삶의 진행을 통해 형성되었던 것처럼 그의 음악적 매력은 삶을 통해 숙성되었다.

그는 1971년 11월 4일-공교롭게도 나는 2017년 그의 생일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캘리포니아주의 세크라멘토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실제 유년 시절은 베이커스필드에서 보냈다. 그의 어머니가 그곳에서 성직자 생활을 했었기 때문.

어린 시절 그에게 어머니는 부모님의 전부였다. 인종차별이 어린 그레고리 포터의 눈에도 보였던 곳에서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늘 삶의 용기와 안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물론 그에게도 아버지가 있었다. 그 또한 성직자였다. 그리고 뛰어난 보컬이자 화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부재중인 경우가 많았다. 어머니와 이혼하면서 그를 거의 찾지 않았다. 그의 형제 중 몇은 아버지와 만나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불행하게도 그에게 아버지는 미지의 사람과도 같았다. 그 결과 그의 어린 시절은 부족한 부성애와 넘치는 모성애로 채워졌다. 실제 그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마마보이 기질이 있다고 밝히곤 했다.

어린 시절 그는 자상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가스펠 음악과 냇 킹 콜의 노래를 들으며 정서적 안정을 찾곤 했다. 때로는 냇 킹 콜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노래를 듣고 냇 킹 콜과 많이 닮았다고 말하곤 했다. 어머니가 좋아한 보컬의 편안하고 정겨운 노래를 통해 그는 늘 부재중이었던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다. “Pick Yourself Up”에서 “다시 일어나라, 훌훌 털어내라.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는 거야. 그러면 어른이 될 거야” 라고 하는 냇 킹 콜의 노래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하는 교훈처럼 다가왔다.

 

미식축구를 포기하고 노래를 시작하다

 

음악을 좋아하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레고리 포터의 꿈은 재즈 보컬이 아닌 미식 축구선수였다. 실력도 뛰어났다. 1989년 하이랜드 고교를 졸업 후 학비, 의료비, 생활비 등 모든 부분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샌디에고 대학의 미식축구 선수로 선발될 정도였다. 그러나 미식축구선수로 활약하겠다는 그의 꿈은 입학 후 얼마 되지 않아 입게 된 어깨부상으로 허망하게 막을 내렸다.

미식축구 선수만을 생각해왔던 그에게 어깨부상은 육체적 고통 이상의 정신적 좌절감을 주었다. 이 때에도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안정을 주었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넘어뜨릴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머리를 맞거나 넘어질 일이 없어졌으니 좋지 않은가? 또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으니 걱정 말라는 긍정적인 말로 어머니는 그를 위로했다.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위로이긴 했지만 그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 도시 계획을 공부하며 삶의 새로운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 교회 등에서 가스펠을 노래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샌디에고의 작은 클럽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에서 샌디에고 재즈를 이끌고 있었던 색소폰 연주자 다니엘 잭슨, 색소폰 연주자겸 피아노 연주자 카마우 케냐타와 트롬본 연주자 조지 루이스, 그리고 트럼펫 연주자였던 길버트 카스텔라노 등과 친분을 맺게 되었다.

그 가운데 당시 샌디에고 대학의 음악 교수였던 조지 루이스는 한 잼 세션 현장에서 그의 노래를 듣고 자신의 수업을 청강할 것을 권유했다. 조지 루이스의 후임으로 부임한 카마우 케냐타도 마찬가지였다. 그레고리 포터가 들었던 수업은 재즈 체임버 앙상블 수업이었다. 이 수업은 보컬을 위한 파트가 없었다. 그래서 혼 악기의 역할을 목소리로 소화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카마우 켄야타는 그레고리 포터가 보컬로서 뛰어난 역량을 지녔음을 간파했다. 그래서 이후 자신의 학생이 음악적 역량을 펼칠 기회를 주기 위해 노력했다. 1998년 플루트 연주자 휴버트 로우의 냇 킹 콜 헌정 앨범 <Hubert Laws Remembers The Unforgettable Nat “King” Cole>에 편곡과 건반 연주자로 참여했을 때 플루트 연주자에게 “Smile”을 위한 보컬로 그레고리 포터를 추천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그레고리 포터는 플루트 연주자의 누나의 추천으로 이미 캐스팅이 완료되었던 뮤지컬 <It Ain’t Nothin’ But The Blues>에 출연하게 된다.)

 

긴 무영 시절을 견디다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그레고리 포터는 자신의 새로운 삶을 음악으로 향하는 것에 확신을 갖지 못했던 것 같다. 도시 계획을 공부해 평범한 사무직원이 되는 것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유방암에 걸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어머니에게 아들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게 하기 위해 이런 자신의 생각을 내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세상을 떠나면서 어머니는 아들에게 노래하는 것이야 말로 그가 잘 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이니 노래를 계속하라고 했다.

“노래를 하렴. 아들아. 노래를”이란 어머니의 유언은 그에게 새로운 삶의 전기를 제공했다.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보컬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후의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첫 앨범 <Water>를 우리 나이로 40세였던 2010년에 발매했으니 근 20년간 성공을 기다리며 무명의 시절을 보낸 셈이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99년 블루스 음악의 역사를 다룬 뮤지컬 <It Ain’t Nothin’ But the Blues>에 출연하며 약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성공으로 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2004년에는 늘 부재 중이었던 자신의 아버지와 아버지 역할을 해주었던 냇 킹 콜을 주제로 한 반 자전적 뮤지컬 반 자전적 뮤지컬 <Nat King Cole & Me>을 만들어 노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경력 대부분은 그의 형제 로이드가 뉴욕 부룩클린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의 주방에서 일하며 노래한 것을 비롯해 여러 클럽을 전전하며 노래한 것으로 채워졌다.

 

직접 쓴 곡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하다

 

근 20년간 성공하지 못한 보컬의 삶을 살면서도 그레고리 포터가 노래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노래하라”는 어머니의 유언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말을 따라 그는 다양한 무대에 서고 또 섰다. 그러면서 재즈와 소울을 오가는 그만의 음악 스타일을 확립하게 되었다. 애초에 그는 꼭 재즈만을 노래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같다. 그보다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노래를 부르는 것에 주력했다. 그가 살았던 베이커스필드는 이민자들이 많았던 곳으로 그만큼 가스펠, 리듬 앤 블루스, 소울, 재즈, 블루스 등과 함께 컨트리 음악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이 공존했다. 그 또한 도시의 음악적 분위기를 흡수하며 성장했다. 따라서 그가 재즈의 전형만을 따르지 않고 보다 다양한 음악 스타일을 아우르는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그는 의도적으로 재즈를 바탕으로 가스펠이나 소울적인 면을 섞어서 노래하려 했다. 그것이 그다운 노래를 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했다.

한편 그레고리 포터의 재즈와 소울을 오가는 노래가 이질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은 자신의 마음을 담아서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의 경험을 노래에 담으려 했다. 아버지의 부재, 어머니의 사랑, 미식축구선수로서의 꿈이 날아갔을 때의 좌절감, 기나긴 무명 생활의 어려움 등에서 느낀 점들을 노래를 통해 표현하려 했다. 그 결과 그의 노래는 지친 삶에 대한 공감과 위로를 제공했다. 또한 자신의 마음을 잘 담기 위해서는 직접 쓴 곡을 노래하는 것이 제일 좋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다른 동료들의 힘을 빌리기도 했지만) 작곡과 작사에도 공을 들였다. 그의 곡을 쓰는 능력은 노래 실력만큼이나 훌륭했다. 그의 어머니가 왜 그에게 노래하는 재능만을 말했던 것일까 의문이 들 정도였다.

 

40대에에 나타난 성공의 길

 

오랜 시간 지역의 클럽에서 공연하며 묵묵히 자신의 음악을 만들어 온 끝에 앨범을 녹음할 기회가 찾아왔다. 2003년부터 완성도 높은 앨범을 제작해 온 모테마 레이블이 앨범 녹음을 제안한 것이다. 레이블은 그에게 여러 제작자와 연주자들의 목록을 보여주며 누구와 함께 하고 싶은지 물었다. 이에 그는 레이블이 제시한 인물 중 한 명이 아닌 카마우 켄야타를 제작자로 선택했다. 오랜 시간 그와 관계를 이어가며 음악적 도움을 주었던 고마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자신의 음악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카마우 케냐타의 제작으로 첫 앨범 <Water>가 발매되었다. 첫 앨범부터 그레고리 포터는 자신의 곡들을 노래했다. 스탠더드 곡이나 웨인 쇼터 등 다른 연주자가 쓴 곡들도 있었지만 앨범의 핵심은 그가 쓴 곡이었다. 이들 곡을 통해서 그는 사랑과 부정의 한 것에 대한 저항 의식을 드러냈다. 그런 과정에서 재즈뿐만 아니라 소울적인 색채를 강하게 드러냈다. 무반주로 노래한 “Felling Good”이나 1960년대 디트로이트를 이야기하는 “1960 What?”같은 곡이 대표적이었다. 한편 칩 크로포드의 피아노만을 배경으로 노래한 곡들에서는 내면으로 향하는 서정성으로 편안하고 따스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40세에 즈음해 발표한 첫 앨범의 반향은 기대 이상이었다. 평자들은 이 앨범을 통해 그가 한동안 부재 중이었던 흑인 보컬의 계보를 다시 이어갈 것임을 예견했다. 나아가 53회 그래미상 최우수 재즈 앨범의 후보에도 오르기도 했다.

역시 2012년 카마우 케냐타와 함께 제작해 선보인 두 번째 앨범 <Be Good>도 이에 버금가는 호평을 받았다. 특히 삶의 긍정과 위로의 정서로 가득한 앨범 타이틀 곡을 비롯해 “Imitation Of Life”, “Real Good Hands” 등의 곡에서의 작곡 능력은 노래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한편 재즈와 소울을 오가는 노래와 서정성을 강조한 곡과 “Bling Bling”, “Work Song”처럼 열정적인 노래의 안배, 그리고 무반주로 노래한 곡(God Bless The Child)으로 앨범을 구성한 것은 첫 앨범의 연장 선상에서 이 앨범을 바라보게 했고 그 결과 안정적인 성공을 거두게 했다.

모테마 레이블에서의 인상적인 두 앨범은 그에게 더 큰 도약의 기회를 제공했다. 2013년 블루 노트 레이블에서 그의 세 번째 앨범 <Liquid Spirits>을 제작하게 된 것이다. 보다 큰 환경에서 앨범을 제작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는 자만하지 않았다. 앞의 두 앨범처럼 소울과 재즈를 오가는 사운드와 삶의 열정과 내적인 평안을 오가는 그만의 노래로 앨범을 채웠다.

앨범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전 세계가 마음을 담아 담백하게 부른 그의 노래에 열광했다. 그 가운데 “Hey Laura”, “The In Crowd” 등의 곡이 특별한 관심을 받았으며 루도빅 나바르 등의 일렉트로 뮤직의 DJ들이 “Musical Genocide” 등의 곡을 리믹스하기도 했다. 그 결과 앨범은 55회 그래미상 최우수 재즈 앨범 부분의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2016년에 발매된 네 번째 앨범 <Take Me To The Alley>에서도 그는 한층 더 원숙해진 작곡 능력과 노래를 선보였다. 특히 이 앨범에서 그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위한 곡(“Don’t Lose Your Steam”, “‘Day Dream”), 어머니를 생각하며 만든 곡(“More Than A Woman”, “Take Me To The Alley”) 등 가족과 친척을 주제로 한 곡을 통해 삶의 위안, 사랑의 정서를 보다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이에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반응했음은 물론이다. 그 결과 그는 59회 그래미 상 최우수 재즈 앨범 부분을 수상할 수 있었다.

 

동료들이 함께 하고픈 보컬

 

한편 성공과 함께 그를 찾는 연주자나 보컬들, 그리고 제작자들이 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의 누 재즈 성향의 DJ이자 제작자인 니콜라 콘테의 2011년도 앨범 <Do You Feel Like I Feel>를 비롯해 색소폰 연주자 데이브 머레이의 앨범 <Be My Monster Love>, 매그너스 린드그렌의 앨범 <Souls>, 트럼펫 연주자 틸 브뢰너의 앨범 <The Movie Album>, 피아노 연주자 해롤드 메이번의 앨범 <Afro Blue>등에 참여해 노래를 불렀다. 또한 니나 사이먼을 위한 앨범 < Nina Revisited: A Tribute to Nina Simone>,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제 음악을 정리한 앨범 <Jazz Loves Disney>등 시대를 대표하는 보컬들이 함께 한 프로젝트 앨범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외에 제이미 컬럼, 로빈 맥켈, 다이안 리브스, 리즈 라이트 등의 보컬들의 앨범에 초대받아 함께 노래하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는 엘라 핏제랄드의 버브 시절 노래에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새롭게 입힌 앨범 < Someone To Watch Over Me>에 참여해 20여년 전에 세상을 떠난 엘라 핏제랄드와 “People Will Say We’re In Love”를 듀오로 노래하기도 했다.

이들 앨범에서도 그의 노래는 색을 잃지 않았다. 재즈, 소울 등 장르와 상관 없이 그 앨범의 사운드에 동화되면서도 자신의 앨범에서처럼 깊은 울림을 주는 노래를 이어갔다.

 

냇 킹 콜에 대한 감사를 담은 새 앨범

 

다시 시간이 흘러 2017년 11월, 그레고리 포터는 새로운 앨범 <Nat King Cole & Me>을 발표했다. 이 앨범은 제작 방식에 있어서는 이전 넉 장의 앨범들과 많이 다르다. 빈스 멘도사가 이끄는 대형 오케스트라를 배경으로 노래했다는 것, 그것도 자작곡이 아닌 냇 킹 콜의 곡들을 노래했다는 것이 그렇다.

이번 앨범에서 그가 냇 킹 콜을 노래한 것은 지난 앨범에서 어머니와 아들을 위한 곡을 노래한 것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는 어린 시절 냇 킹 콜의 노래에서 아버지를 느꼈다. 또한 냇 킹 콜의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키웠다. 그러므로 어머니와 아들에 이어 냇 킹 콜을 노래한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게다가 이미 2004년 앨범 타이틀과 같은 제목으로 뮤지컬을 만들기도 했지 않았던가?

냇 킹 콜을 노래한다고 해서, 그는 냇 킹 콜 식으로만 노래하지 않았다. 사실 이전 앨범들에서 그는 은연 중에 냇 킹 콜의 영향을 드러내곤 했다. 그래서인지 이번 앨범에서는 보다 극적이고 중후한 매력을 강조해 노래했다. 냇 킹 콜의 영향이 만들어 낸 그의 현재, 원숙해진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버지를 대신했던 선배 보컬에 감사의 마음을 표하는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특히 <Liquid Spirits>에 수록되었던 “When Love Was King”에서의 절규에 가까운 호소나 글래디스 쉘리의 작곡으로 냇 킹 콜이 아닌 그의 동생 프레디 콜이 노래했던 “I Wonder Who My Daddy Is”에서의 편안함과 씁쓸함이 어우러진 회상조의 분위기는 냇 킹 콜에 대한 그다운 헌정이라 할만하다.

이처럼 냇 킹 콜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그레고리 포터의 유년 시절의 추억과 어우러져 표현되었기에 자작곡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래는 이전 앨범들처럼 많은 사람들의 지친 마음을 위로하고 평안하게 해줄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 과거에 얽매어 살 필요도 없다. 어쩌면 이번 다섯 번째 앨범은 그레고리 포터에게 새로운 출발점을 제공하지 않을까 싶다. 자신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냇 킹 콜의 음악을 정리했으니 이제는 보다 새로운 음악적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확실한 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 그의 음악은 더욱 숙성되어갈 것이고 그 깊은 맛은 오랜 시간 우리를 즐겁게 하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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