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1900. 8. 4 ~ 1971.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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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노래했던 재즈의 아버지

내가 아주 어렸던 1970년대 중반, 당시 TV에서 인기를 얻었던 코미디언 중에 남보원씨가 있었다. 아마 영어의 Number One을 우리 식으로 바꿔 예명으로 정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그는 주로 성대모사로 사람들을 웃겼다. 그가 성대모사했던 사람 가운데는 암스트롱이라는 외국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나는 암스트롱이 누군지 몰랐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서는-그래 봐야 초등학생 때였지만-그가 모사한 암스트롱이라는 사람이 최초의 달 착륙자라고 하는 미국의 우주 비행사 닐 암스트롱이 아닌가 의문했을 정도였다. 남보원씨가 성대모사한 사람이 닐 암스트롱이 아니라 루이 암스트롱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였다. 그때서야 루이 암스트롱의 가래가 끓는 듯한 걸쭉한 목소리를 듣게 되었던 것이다.

아마 남보원씨를 유년시절의 인기 연예인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와 비슷한 추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잘 모르는 사람을 성대모사했다는 추억 말이다. 그렇다면 왜 남보원씨가 루이 암스트롱의 목소리를 성대모사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답은 간단하다. 나는 몰랐지만 적어도 나의 부모님 세대에게는 루이 암스트롱이 인기 있는 팝 스타였던 것이다. 특히 해외 연주자들의 내한 공연이 많지 않았던 1961년 내한하여 공연을 펼쳐 국내에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루이 암스트롱에게는 두 개의 별명이 있다. 먼저 사치모(Satchmo)라는 별명이 있다. 얼핏 일본말 같기도 한데 큰 입을 가진 사람이라는 Satchelmouth의 약어로 그의 두툼한 입술을 보고 붙인 별명이다. 다른 하나로는 팝스(Pops)라는 별명이 있다. 이 별명은 그가 얼마나 큰 인기를 얻었는지를 말한다. 그는 뉴올리언즈와 시카고를 거쳐 뉴욕에 정착한 1929년부터 최고의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Hello Dolly’를 비롯하여 그가 노래하는 곡들은 모두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에 힘입어 ‘Rhapsody In Blue & Black’등 많은 할리우드 영화에도 출연하게 되었다. 또한 1950년대에는 재즈 대사가 되어 세계 곳곳을 돌며 공연을 할 정도로 명사 대접을 받는 자리에 올랐다. 그 결과 그는 ‘최초로 백인의 사랑을 받는 아티스트’가 되었다. 그러므로 팝스라는 별명은 그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의 음악이 널리 사랑 받았던 것은 특유의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정서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들어도 명쾌하면서 힘이 넘치는 그의 트럼펫은 사람의 정신을 맑게 하는 힘이, 가래가 끓는 듯한 목소리로 부른 그의 노래는 처음에는 거북한 듯하다가도 이웃집 아저씨의 넉넉한 웃음처럼 감상자를 유쾌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런데 좋은 의미로 붙여졌던‘최초로 백인의 사랑을 받은 아티스트’라는 칭호는 흑인 연주자들 사이에서‘백인들의 어릿광대’로 해석되기도 했다. 마일스 데이비스 같은 연주자는 그가 재즈 본연의 맛을 잃어버리고 상업적인 엔터테이너가 되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팝스라 불리긴 했지만 팝을 노래하지 않았다. 그가 노래한 재즈가 팝 그 자체가 되었을 뿐이다. 즉, 그로 인해 재즈가 팝 음악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백인 남성 보컬 빙 크로스비는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을 두고 했다는 ‘미국 대중 음악의 시작과 끝’이라는 표현은 정학하게는 루이 암스트롱의 재즈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따라서 그가 아니었다면 재즈는 뉴올리언즈의 토속 음악 정도에 머물렀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는 재즈가 고차원적인 음악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이것은 그를 비판했던 마일스 데이비스조차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주제와의 관련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순간적 감흥에 따라 노래하듯 새로운 멜로디를 만들어 내는 연주로 즉흥 솔로 연주(Improvisation)의 모범을 제시했다. 또한 재즈 보컬 분야에서도 목소리를 하나의 악기처럼 사용하여 자유로운 솔로를 펼치는 스캣(Scat) 창법을 개발했다. 이 창법은 1926년 ‘Heebie Jeebies’란 곡을 녹음하는 중에 악보가 바닥에 떨어져 가사를 볼 수 없게 되자 할 수 없이 ‘두비-디비-두왑’같은 의미 없는 소리로 노래한 것이 하나의 스타일로 정착된 것인데 후에 엘라 핏제랄드 등에게 계승되면서 재즈 보컬의 기본으로 자리잡았다.

이처럼 재즈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음에도 그는 결코 이를 과시하지 않았다. 주위의 부정적인 오해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음악을 인종적인 차이를 넘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의 노래와 연주를 듣고 즐거워하기를 바랬다. 12세의 마지막 날 허공에 대고 실탄을 실수로 쏜 죄로 소년원에 들어갔을 때 그 불행 속에서 배운 코넷-트럼펫과 유사한 악기-과 뉴올리언즈 재즈가 그의 인생을 바꾸었던 것처럼 자신의 음악으로 어려운 사람들의 삶이 행복해지기를 바랬다. 그렇게 그 스스로가 자신의 음악을 즐겼기에 인종 차별이 그토록 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백인들이 그를 좋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렇다 치고 나와 비슷한 세대의 사람들 대부분은 루이 암스트롱의 목소리를 1990년대 초반 한 맥주광고에 사용된 ‘What A Wonderful World’를 통해서 처음 들었을 것이다.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탄하는 내용의 그 노래는 90년대의 젊은이들에게 색다른 낭만을 선사했다. 나는 이 노래가 그의 삶을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음악적으로 대표하는 노래를 꼽으라 한다면 다른 곡들이 먼저 선택될 확률이 크다. 남보원씨가 그의 목소리를 성대모사할 때 불렀던 곡만 해도 이 곡이 아니라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그를 대표하는 곡으로 ‘What A Wonderful World’를 선택한 것은 그가 평생 삶을 경탄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나아가 1971년 7월 6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유쾌하고 즐거운 음악으로 사람들이 세상을 멋지게 바라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음악이 지닌 행복한 마력은 지금도 유효하다.

대표 앨범

What A Wonderful World (RCA 1970)

루이 암스트롱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녹음한 앨범으로 그의 대표곡 ‘What A Wonderful World’를 담고 있다. 오케스트라의 반주를 배경으로 지난 삶을 회상하는 듯한 분위기로 진행되는 이 노래는 노년을 맞은 거장의 긍정적인 세계관의 결정판이었다. 그 밖의 다른 수록곡들 또한 늘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살았던 루이 암스트롱의 낭만적 매력을 느끼게 해준다.

Louis Armstrong Plays W.C. Handy (Columbia 1976)

la루이 암스트롱이 음악적으로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맛볼 수 있는 앨범. 앨범에서 루이 암스트롱은 뛰어난 블루스 작곡가 W.C. 핸디의 곡들을 자신의 올 스타즈 밴드와 함께 노래하고 연주했다. 그는 핸디의 블루스에 담겨 있던 흑인들의 회한과 고뇌를 특유의 밝고 희망적인 정서로 바꾸었다. 특히 ‘Saint Louis Blues’는 루이 암스트롱의 보컬뿐만 아니라 트럼펫이 지닌 매력을 실감하게 한다.

Ella & Louis (Verve 1956)

ef루이 암스트롱은 엘라 핏제랄드와 석장의 인상적인 앨범을 녹음했다. 그 앨범들 모두는 재즈 역사상 가장 빛나는 듀엣이라 불릴만한 환상적인 어울림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그 가운데 이 앨범은 그 첫 번째 만남을 담고 있다.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의 반주에 맞추어 때로는 연인처럼 때로는 오누이처럼 편안하게 어울리는 두 사람의 아름다운 조화가 달콤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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