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rchard – Lizz Wright (Verve Forecast 2008)

보다 자유로워진 영혼을 울리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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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을 알 수 없을 정도의 깊이 있는 목소리, 흑인 특유의 끈적거림이 살아 있는 창법, 탄력 있는 리듬감, 그리고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직접 다가오는 정서. 보통 우리가 흑인 보컬 하면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들이다. 하지만 현재 의외로 이런 깊은 맛을 내는 흑인 보컬을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예로, 흑인의 오랜 텃밭인 재즈의 경우 지난 10여 년 전부터 다이아나 크롤, 제인 몬하이트, 스테이시 켄트 등의 달콤하고 안락한 느낌을 주는 백인 여성 보컬이 득세하면서 흑인 여성 보컬의 위상이 다소 축소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리고 흑인 재즈 보컬을 대표한다는 디 디 브리지워터, 다이안 리브스, 나탈리 콜 같은 보컬의 경우 너무 전통적이거나 기교적인 측면을 더 강조하는 노래를 들려준다는 아쉬움이 있다. 또한 흑인 중심의 또 다른 음악인 R&B, 소울 음악의 경우 도시적 분위기를 지향하는 다양한 리듬 패턴과 뇌쇄적이라 할 정도로 감각적인 기교를 추구하는 보컬들이 주를 이룬다. 물론 이처럼 이 시대가 부드럽고 나긋나긋 속삭이는 듯한 백인 재즈 보컬이나 도시적 관능을 표현하는 R&B, 소울 보컬을 선호하는 데는 그만큼 우리가 감각적이고 고민 없는 편한 삶을 살게 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현실 안주적인 삶을 살다 보면 오히려 마음에 오랜 여운을 남기는 순수하고 깊이 있는 보컬 음악이 듣고 싶어지곤 한다.

대중성과 깊이를 겸비한 흑인 보컬 리즈 라이트

이런 상황에서 리즈 라이트의 등장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그녀는 분명 백인 보컬의 가벼움에 식상함을 느끼고 기존 흑인 보컬의 기교 중심에 아쉬움을 느끼는 감상자들이 원했던 바로 그 보컬이다. 특히 기교보다는 특유의 스모키한 콘트랄토-여성 보컬 가운데 최저 성부를 지칭하며 재즈에서는 니나 사이먼이 콘트랄로 보컬로 유명하다-목소리로 담백하게 노래하여 직접 감상자의 가슴을 울리는 그녀의 창법은 영혼으로 노래하는 것이 지닌 힘과 매력을 생각하게 해준다. 그런데 사실 그녀의 콘트랄로 목소리와 순수한 창법은 멀리는 빌리 할리데이에서 출발하여 니나 사이먼을 거쳐 최근에는 카산드라 윌슨으로 이어지는 한 흐름의 연장 선상에 놓이는 것이다. 그리고 니나 사이먼과 카산드라 윌슨으로부터는 창법 말고도 재즈 외의 다양한 음악을 창조적으로 흡수하는 음악적 자세 또한 영향 받았다는 느낌을 준다. 실제 그녀는 재즈, 가스펠, R&B, 포크 등의 음악을 부분적이 아니라 종합적으로 수용하여 영혼을 울리는 듯한 자신의 목소리에 맞게 변형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그렇기에 그녀의 음악은 낡았다는 느낌을 주지 않을 뿐더러 보다 폭 넓은 감상자들이 쉽게 그녀의 음악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매력을 지녔다.

이처럼 현대적이고 팝 적인 사운드 덕분에 그녀는 노라 존스에 대한 흑인 보컬의 대답으로 평가 받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가 버브 레이블을 통해 발매한 두 장의 앨범 <Salt>(2003)와 <Dreamin Wide Awake>(2005)는 노라 존스 만큼의 성공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감수성을 지닌 깊이 있는 흑인 보컬의 등장이라는 평을 얻으며 재즈 쪽에서는 큰 인정을 받았다. 특히 두 번째 앨범 <Dreamin Wide Awake>는 빌보드 컨템포러리 재즈 차트의 정상에 오르기도 했다.

보다 근원으로 돌아간 세 번째 앨범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리즈 라이트의 세 번째 앨범 <The Orchard> 역시 그녀의 기존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음악을 들려준다. 하지만 겉으로는 유사하게 보여도 이번 앨범에서 리즈 라이트는 지난 두 장의 앨범에 비해 보다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려 했다는 인상을 준다. 그것은 무엇보다 외적인 스타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지난 두 장의 앨범 역시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종합적으로 소화했던 만큼 그녀의 음악적 정체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선곡이나, 밴드 편성, 그리고 참여 연주자의 면모 등에서 재즈와의 관련성을 놓지 않는 것으로 그녀는 이런 논란을 비켜나갔다.

그러나 이번 앨범에서 그녀는 스스로 이런 저런 외적 음악 형식에 구애 받지 않음을 공표하고 있다. 이것은 그녀가 자신의 고향인 조지아 주의 작은 도시 하히라(Hahira) 근처의 시골 과수원(The Orchard)을 지날 때 이번 앨범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는 것, 그리고 이를 버브 레코드 관계자와 참여 연주자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과수원 사진으로 채워진 슬라이드를 만들면서 여기에 재즈가 아닌 탐 웨이츠의 노래 “I Hope That I Don’t Fall In Love With You”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그녀가 재즈나 가스펠을 버리고 포크를 선택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자신의 정서를 제대로 담을 수 있다면 스타일은 고려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이번 앨범에는 그녀가 유년 시절부터 육화한 가스펠, 소울 그리고 포크가 이전 앨범보다 더 직접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게다가 참여한 연주자들의 면모도 더 이상 재즈와 큰 관련성을 보이지 않는다. 특히 두 번째 앨범에 백그라운드 보컬로 참여 하기도 했던 토시 리건이 리즈 라이트와 공동으로 절반 가량의 곡을 작곡하고 기타까지 연주했다는 것과 포크 음악의 대표적 인물 밥 딜란의 오랜 사이드맨이었던 래리 캠벨의 참여했다는 점은 이번 앨범의 색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한편 레드 제플린의 “Thank You”, 아이크 터너의 “I Idolize You”, 여성 아카펠라 그룹 Sweet Honey In The Rock의 가스펠 명곡 “Hey Mann”그리고 컨트리 가수 팻시 클라인의 “Strange”등을 노래했다는 것도 리즈 라이트가 이번 앨범을 오로지 자신의 음악적 근간을 솔직하게 드러내려 했음을 생각하게 해준다. 실제 다양한 음악적 성향을 지닌 이들 곡들은 리즈 라이트의 목소리를 통해 새로운 영혼을 부여 받았다 싶을 정도로 하나된 느낌을 준다.

자기 목소리에 대한 강한 신뢰

그런데 리즈 라이트가 이번 앨범에서 스타일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 자신의 음악적 근간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목소리에 대한 강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었다. 목소리가 스타일을 아우르고 뛰어넘는다고나 할까? 순수하다 못해 성스럽기까지 한 그녀의 목소리는 음악 스타일에 상관없이 강상자의 영혼을 바로 향하는 힘을 지녔다. 그래서 이 앨범을 듣다 보면 스타일을 생각하기 이전에 그녀의 노래가 표현하는 정서에 먼저 매혹 당하게 된다. 그러면서 바쁜 도시적 삶, 친밀한 의사 소통이 어려운 현대적 삶에 지치고 외로운 우리들의 영혼이 잠시나마 정화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음악 가운데는 스타일을 생각하기 이전에 가슴으로 먼저 그 음악이 발산하는 정서를 포착하기를 요구하는 음악이 있다. 이 정도만 되도 그 음악은 충분히 감동적이라는 평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리즈 라이트의 이번 앨범은 가슴으로 들을 것마저 요구하지 않는다. 듣는 즉시 의식하기도 전에 감상자의 가슴에 깊은 감동의 파문을 남기니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앨범이 오랜 시간 우리의 영혼을 위로하는 앨범으로 남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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